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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한인 땀과 꿈의 100년](1-1) 희망 실은 게일릭호 첫 입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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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한인 땀과 꿈의 100년](1-1) 희망 실은 게일릭호 첫 입항

입력
2003.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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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1월13일 새벽. 검붉은 여명을 뚫고 하와이의 호놀룰루 항에 도착한 게일릭호에서 태평양을 건너온 102명의 한국인 일행이 낯선 땅에 첫발을 디뎠다. 사탕수수 농장에서의 노동이민을 위해 정든 땅을 떠나 신천지를 찾아온 이 선구자들로부터 비롯된 미주 한인이민역사가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다. 미주지역에 처음으로 본격적인 한인신문 시대를 연 한국일보사는 미주한인 이민 100주년을 맞아 미주 한인사회의 새로운 모습과 미래에의 전망을 시리즈로 싣는다. /편집자주

1903년 1월13일 증기선 게일릭호를 타고 호놀룰루 항에 내린 최초의 공식 이민자 102명을 필두로 1905년 7월까지 약 2년 반동안에 총 65편의 이민선을 통해 모두 7,800여명의 한인 노동 이민자들이 하와이로 건너왔다.

사탕수수 농장과 노동 계약을 맺고 하와이 땅에 내린 이들은 호놀룰루 항이 속한 주섬 오아후(Oahu)뿐 아니라 이웃 섬인 마우이(Maui), 카우아이(Kauai), 그리고 빅아일랜드라 불리는 하와이(Hawaii)에 산재해 있는 각 사탕수수 농장으로 흩어져 힘든 노동 이민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첫 이민선인 게일릭호에는 문대양(62·영어명 로널드) 현 하와이주 대법원장의 할아버지인 문정헌씨와 외할아버지인 이만기씨도 타고 있었다. 평양 출신의 문정헌씨는 처음 빅 아일랜드에 있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다 이후 사진신부를 맞아 결혼을 한다. 이들 부부 사이에서 3남1녀가 태어나는데 이중 둘째 아들이 후일 문 대법원장의 부친이 되는 문덕만(영어명 듀크)씨다.

1905년까지 약 2년반동안 65편의 이민선을 통해 하와이로 온 7,800여명의 한인중 2,000여명은 미 본토로 재 이주했고 1,000여명은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남아있던 한인들도 차차 농장을 떠나 다른 직종이나 자영업 등으로 경제 기반을 꾸려갔다. 1910년부터는 하와이 이민 제2의 물결이라 할 수 있는 사진신부들이 들어오면서 하와이 한인 이민사회는 번성기를 맞게 된다.

사탕수수 농장을 떠난 한인들은 하와이 지역의 중심 도시인 호놀룰루와 파인애플 농장이 형성된 오아후섬 중심부의 와히아와(Wahiawa) 등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특히 1909년 군기지가 들어서면서 타운이 번성하기 시작한 와히아와는 1910년대 후반을 거치며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자리를 찾거나 군인들을 상대로 한 세탁업 등에 진출하는 한인들이 모여들면서 한인 밀집촌을 형성, 1910년대와 20년대를 거치며 당시 한인사회의 중심부로 등장한다.

각각 다른 곳에서 사탕수수 노동자로 일하던 문 대법원장의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도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가족을 이끌고 농장을 떠난다. 이들 가족이 정착한 곳도 당시 한인 이민자들의 밀집촌으로 떠오르던 와히아와였다.

조부 문정헌씨는 이곳에서 양복점을, 외조부 이만기씨는 이발소를 운영하며 기반을 다져갔고 같은 지역에 살게 된 문씨와 이씨 집안은 서로 사돈을 맺게 된다. 문정헌씨의 아들로 한인 2세인 문덕만씨와 역시 한인 2세인 이만기씨의 딸 메리 이씨가 서로 만나 결혼을 하게 된 것. 바로 이들 사이에서 후일 하와이 제일의 법관이 되는 한인 3세 문대양이 태어나게 된다.

문 대법원장은 1958년 미드팩 하이스쿨을 졸업하고 본토 아이오와주로 대학을 가게 된다. 대학에서 심리학과 사회학을 전공하며 공부에 빠져든 문 대법원장은 62년 학사학위를 딴 뒤 그 해 가을 아이오와 주립대 법대에 진학, 후일 법관이 되는 길을 닦는다. 65년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딴 문 대법원장은 하와이로 돌아와 당시 하와이 연방지법 마틴 펜스 판사 사무실에서 일하며 법조계에 발을 디딘 뒤 검사직을 거친 후 합동 법률회사를 설립, 14년간 변호사로 활동하다 82년 판사로 다시 공직에 복귀, 대법원장에 까지 이르게 된다.

한인 초기 이민자들은 사업으로 성공한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 가난 속에 삶을 마쳤으나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이 남달랐고, 이것이 후대의 '화려한 개화'를 가져오는 밑거름 역할을 했다.

문씨 가문의 3세대인 문 대법원장의 형제는 3남1녀로 장남인 문 대법원장에 이어 차남인 에릭 문씨도 법조계에 진출, 현재 오아후의 이웃섬 카우아이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고 3남 듀크 문 주니어는 호놀룰루시 공무원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막내딸 메리는 언어치료 전문가로 오리건주에 살고 있다.

또 4세대인 문 대법원장의 자녀들은 의사인 두 아들 로널드 주니어와 스캇, 그리고 딸 줄리 등 2남1녀로 문 대법원장은 이들에게서 벌써 손자를 다섯이나 봤다. 100년 전 노동 이민자로 뿌리내린 문씨 가문의 줄기가 어언 5대까지 뻗어나간 것이다.

/하와이=특별취재반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항을 출발해 이듬해 1월 13일 하와이에 도착한 첫이민자의 존재를 공식 확인해주는 문서가 하와이대 해밀턴도서관의 하와이사탕수수농장주연합회의 문서고에서 발견됐다. 이 문서는 사탕수수노동자들을 한국에서 모집하고 수송하는 일을 담당했던 데이비드 데쉴러라는 미국인이 이들을 고용하게 될 농장주들에게 보내는 편지다. 다음은 편지의 내용.

■"그들은 가장 성실한 노동자"

존경하는 농장주 여러분께.

이번에 게일릭호를 타고 가는 사람들과 관련해 몇 가지 조언을 하고자 합니다. 이번에 가는 사람들은 통역사 2명, 남자 54명, 여자 21명, 아이들 25명 등 모두 102명입니다.

이들은 모두 정신무장이 잘 돼 있고 하와이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주어진 일을 훌륭하게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한국의 저층민들의 보수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들의 이민이 갖는 의미를 깨닫지 못할 겁니다. 서울과 제물포에 사는 나이많은 사람들은 이주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데에 대해 아주 놀라워 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이민에 대해 의심스러워 하고 또 상당한 두려움을 갖고 있기때문에 이런 부분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가장 힘들었고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이제 이들의 이주가 성공하느냐 마느냐는 여러분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들에게 좋은 대우를 해주면 여러분들은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다루기 쉬운 노동자들을 확보할 뿐 아니라 이들을 우리 사회의 영원한 구성원으로 자리잡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곳 한국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이민자들로부터 소식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사탕수수 노동자 모집 사업이 잘 되느냐는 전적으로 여러분들이 얼마나 이들을 잘 대해 주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들을 친절과 인내로서 대해 주십시오. 이들을 어린아이 다루듯 해야 합니다. 이들에 대해 동정심을 갖고 대할 때 당신들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태어나서 한번도 고향을 벗어나 본적이 없기 때문에 이들이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것입니다.

이들은 이민의 개척자들로 모든 사업은 이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나는 이들이 무사히 여러분들 손에 넘어갈 것을 믿으며 깊은 관심을 갖고 여러분의 상세한 조언을 기다리겠습니다.

기일릭호 선상에서 D.W. 데쉴러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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