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 팁을 생산하는 SPM이 본격 가동되면서 모나미 153 볼펜 생산량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SPM의 설치와 생산량 증대는 생산 원가 하락, 볼펜 가격 인하 효과를 수반했다. 국내 볼펜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던 모나미의 사세는 나날이 커갔다.나는 이후 SPM 4대를 추가로 도입했다. 성수동 공장에는 2개의 SPM실이 있었다. 한 방에는 4대, 다른 한 방에는 1대의 SPM을 배치했다. SPM의 분리 배치는 만약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 위험을 분산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그런 '기우'는 현실로 나타났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1978년 10월28일 새벽, 북아현동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새벽에 웬 전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러 갔던 아내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여보, 일어나세요. 공장이래요."
새벽에 공장에서 전화가 오다니,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수화기를 건네주는 아내도 긴장한 탓인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전화 바꿨습니다."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공장에 불이 났습니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성수동 공장이 어떤 곳인가. 내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 곳이었다. 어디 나 하나 뿐인가. 회사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온 1,000여명 모나미 식구들의 생계가 달려있는 곳이다. 나는 냉정함을 잃지 말자고 다짐하며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직원에게 상황을 물었다. 맨 먼저 챙겨보아야 할 곳은 다름 아닌 SPM실, 모나미의 심장부였다.
"SPM실은 무사한가." "죄송합니다, 사장님. 불이 난 곳이 하필 SPM실입니다."
SPM실이 다 탔다면 모나미의 미래는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SPM은 기계 자체가 큰 기름덩어리였다. 금속재료를 깎고 다듬어 팁을 만들다 보니 항상 윤활유가 필요했다. 게다가 SPM실은 목조 건물내에 있었다. 그래서 24시간 3교대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항상 SPM실에서 만큼은 담배를 피지 말라고 강조해왔다. 불이 난 원인은 너무나 자명했다.
비통했다. 50년을 살면서 그렇게 가슴 아픈 적이 없었다.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아내의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옷을 챙겨입고 아내를 안심시킨 뒤 잠자는 아이들을 살펴보고 나서 차에 올랐다. 시계를 보니 통금 해제 전이었다. 일단 파출소에 들러 통행허가를 받은 뒤 공장으로 달렸다. 시간은 새벽 4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공장은 흡사 전쟁터 같았다. 직원들은 폐허가 되다시피 한 공장 주변을 우왕좌왕 뛰어 다니고 있었고, 소방대원들은 남은 불씨를 제거하기 위해 소방호스로 물을 뿌리고 있었다. 다행히 SPM실이 있는 목조 건물만 타고 본관 건물 등은 멀쩡했다. 나는 저지하는 소방대원을 밀치고 SPM실로 갔다. 역시 예상대로 였다. SPM은 하늘을 지붕 삼아 시커먼 재를 뒤집어 쓴 채 을씨년스럽게 서있었다. 손으로 SPM에 잔뜩 묻은 재와 물기를 걷어내다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울 수 없었다.
'내가 나약해지면 안된다. 내가 흔들리면 모나미와 직원들은 누굴 믿고 따를 것인가.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사내 대장부가 탄식과 후회가 웬말인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검게 그을린 SPM 앞에서 나는 그렇게 내 스스로를 위로하며 각오를 새롭게 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직원들이 놀랄 정도로 침착하게 상황을 수습해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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