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 34도 17분 21초. 한반도의 육지부 최남단인 전남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 땅끝의 좌표다. 이곳 해발 156.2m의 사자봉에는 전망대가 세워져있고 아래로 내려가면 바닷가에 길고 뾰족한 삼각꼴의 땅끝 기념탑이 있다.한해가 저무는 12월의 끝 자락, 땅끝에 서는 마음은 각별할 수 밖에 없다. 걸어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꽃잎처럼 둥둥 뜬 남해 바다 섬들만 눈 앞에 조용하다. 땅끝이 관광지로 유명해지기 전 그 이름에 홀려 실연당한 청춘이나 이런 저런 사연으로 절망한 이들이 땅끝을 찾아 울었다 한다. 1980년대 중반 해남에 머물던 시인 김지하도 땅끝에 와서 '애린'을 썼다.
<땅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끝에 돌아갈 수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숨거나 바람이거나 구름이거나 귀신이거나간에 변하지 않고는 도리 혼자 부르는 불러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하늘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 덩이 검은돌이 빛나는 오리 햇빛 애린 나> ('그 소, 애린 50') 땅끝에>
끝은 곧 시작임을 땅끝에서 깨닫는다. 붉은 노을을 장렬하게 뿌린 뒤 수평선 아래로 미련 없이 뚝 떨어지고 마는 해를 바라보는 동안 마음에는 새로운 해가 뜬다.
한반도의 서남부 모서리 전남 해남군. 서울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따라 목포까지 가서 해남으로 들어가면 4시간 반 거리다. 여기가 조선시대 주요 유배지로 꼽혔던 멀고 외진 곳이었던가.
해남은 따뜻하다. 조선 중기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겨울에도 초목이 시들지 않고 벌레가 움츠리지 않는 곳"이라 했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일이 별로 없고 추워봤자 영하 2, 3도가 보통이다. 지금 해남의 들판에는 속이 꽉 찬 배추가 시퍼렇다. 산이면 배추밭에서 만난 부산에서 왔다는 상인은 "겨울이면 전국 배추 장사가 해남으로 다 모인다"고 했다. 전국 겨울 배추의 70%가 여기서 난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하며 튼실하게 큰 씩씩한 배추 옆으로 한 뼘쯤 자란 마늘과 손가락 만큼 내민 보리가 나란히 녹색 행진을 하고 있다. 해남의 고찰인 두륜산 대둔사(대흥사) 달마산 미황사는 11월부터 피기 시작한 동백꽃이 점점이 붉다.
전라남도 전체 면적의 7.17%로 도내에서 가장 넓은 해남군은 전체 가구의 절반이 농사를 짓는다. 낮은 구릉과 간척지에 비옥한 평야가 넓게 펼쳐져 쌀이 많이 나고 밭에서는 고구마와 마늘, 고추를 주로 재배한다. 송지면 등 바닷가로는 김 양식도 많아 전국 김 생산량의 13%를 차지한다. 땅이 넓고 산물이 넉넉하니 아등바등 하지 않고 장사를 해도 야박하지 않은 게 예로부터 해남 살림이라 한다.
해남 사람을 가리켜 '해남 물감자'니 '해남 풋나락'이란 표현이 있다. 물감자는 지금은 거의 사라진 재래종 물고구마를 가리킨다. 감자는 북방에서 왔다, 하지에 캔다 하여 '북감자' '하지감자'로 불렀다. 파근파근한 밤고구마 일색인 요즘 고구마와 달리 물감자는 꿀맛처럼 달고 물렁물렁한 게 쪽 짜면 홍시처럼 쪼르륵 흘렀는데, 겨울철 점심 대용으로 그만이었다.
황도훈 해남문화원장(78)은 "물감자나 풋나락은 무르다, 덜 익었다는 놀림말로 통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해남 인심이 드세지 않고 순박함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그는 "해남은 예로부터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문화 이동로의 중심에 있어 외래문화에 포용적이고 개방적이었다"며 "꽝꽝 익어서 단단하면 그러한 원만함이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또 "그러한 포용력이야말로 해남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남이 속 없이 마냥 무르기만 한 건 아니다. 일제 때인 1920년대 사회주의운동과 1970년대 기독교 농민운동의 출발지이자 1980년대 전교조 운동이 전국에서 가장 활발했던 곳이기도 하다. 황 원장은 "1980년 신군부 등장 이후 치러진 첫 총선에서 당시 집권 민정당 후보가 떨어진 곳이 전국에서 딱 두 군데, 제주와 해남이었다"고 소개한다.
해남은 시인의 고장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해남에 살며 한글 시문학의 정점을 이룬 고산 윤선도의 맥은 현대에 이르러 '강강술래' 의 이동주(1920∼1979) 저항의 시대 80년대를 온 몸으로 뚫고 살다 간 김남주(1945∼1994) 고정희(1948∼1991) '아아 광주여, 우리 나라의 십자가여'의 김준태(54) 황지우(50)를 낳았다. 해남읍내 군청 앞 한 카페, 거리가 내다보이는 창가에는 김준태 등의 손때 묻은 시집이 놓여있었다.
지난 주 해남은 뉴스가 많았다. 10년 넘게 표류하던 화원면의 해양관광단지 개발사업이 본궤도에 올라 23일 골프장 및 기반 조성공사 기공식을 가진 데 이어 27일 도립공원 두륜산의 케이블카가 개통됐고 같은 날 땅끝 해양자연사박물관도 문을 열었다. 이 소식들은 읍내 고등학생의 서울대 진학, 군내 한 종합병원의 원장 부임, 올해 4월 개관한 해남문화예술회관의 연말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과 나란히 곳곳에 걸려 나부끼고 있다.
화원면 관광단지 개발은 노태우 대통령 시절 공약인데, 그동안 공사 주체인 한국관광공사의 재정난과 IMF 위기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최근 토지 매입을 거의 마쳐 기공식을 갖게 된 것. 화원반도 일원 154만 평 부지에 1조원을 들여 27홀의 골프장, 300척 규모의 요트장에 호텔과 콘도 등 시설을 2005년까지 완공하는 대규모 사업이다. 본격적인 공사는 새해 초 시작한다. 군에서는 사철 푸른 해남의 잔디밭에서 바다를 향해 공을 날리는 골퍼들을 맞게 되면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란 기대가 크다.
화원면의 관광단지 개발은 최근 10년간 해남의 주요 뉴스 중 하나다. 다른 뉴스로는 1993년 서울에서 목포로 가던 아시아나 여객기가 화원면 야산에 추락해 66명이 숨진 사고, 1996년 황산면 우항리의 대규모 공룡 화석지 발견, 지난해 땅끝 전망대 건립, 올해 황산면에 들어오려던 핵폐기물 처리장이 주민 반대로 무산된 것 등을 꼽을 수 있다. 최근에는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미선이 효순이 사건이 가장 큰 관심사가 되어 읍내에서 추모 촛불시위도 열렸다.
그런가 하면 송지면의 김 양식 어민들은 날로 늘어가는 빚에 수심이 가득하다. 250여 가구 중 153 가구가 김 양식을 하는 송지면 어란리는 한때 김 양식 덕에 부자동네로 소문났지만 지금은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한 10년 째 김이 흉작이라 생산량이 반 이상 줄어든데다 김 값은 계속 떨어져 집집마다 빚이 보통 7,000만∼8,000만원입니다. 연말 수협 이자도 갚아야 하고 새학기가 시작되면 애들 등록금도 내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전업을 할 수도 없어요. 예전엔 김 채취선에 보통 4명이 타고 나갔는데, 요새는 인건비라도 아끼려고 부부끼리 일하죠."
위판장에서 만난 어란리 어촌계장 임상민(42)씨의 말이다. 그는 "김 양식 어민들 전부 코가 쑥 빠져서 죽니 사니 하는 판"이라면서 "정부에서 특단의 조치를 해서 좀 살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마찬가지겠지만, 해남군도 지역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표정이다.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땅끝에서는 해가 뜨고 해가 진다. 올해도 다 저물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사진 왕태석 기자
● "땅끝마을" 갈두리 김유복 이장
땅끝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연말이면 손님맞이 준비로 바빠진다. 12월 31일부터 1월 1일까지 열리는 땅끝 해넘이·해맞이 축제 때문이다. 지난해 이 행사를 찾은 사람이 무려 7만 명. 평소 해남읍에서 40분이면 닿는 거리가 이때는 차량 행렬이 20㎞나 밀려 서너 시간씩 걸린다. 63호 250여 명이 사는 작은 마을은 사람에 치여 걸어다니기도 힘들 정도가 된다.
7회 째인 올해 축제를 앞두고 땅끝마을이 자리잡은 송지면 갈두리의 김유복(55)이장은 행사에 쓸 각종 물품이며 준비 상황을 챙기느라 바쁘다. 24일 아침 8시, 마을 스피커를 통해 김 이장의 방송이 흘러나왔다. "해맞이 축제 땜에 말씀드리겄습니다. 손님들을 친절히 모셔주시고 많은 요금을 받아선 안되겄습니다. 공터나 도로, 선착장 주변에 물건을 두신 분들은 차량이 통행할 수 있게 치워주시기 바랍니다."
축제는 31일 오후 1시 저마다 소망을 적은 빨강 파랑 노랑 깃발을 들고 사자봉에 오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옛날 방식대로 간장으로 쓴 글씨에 밀가루를 뿌려 도드라지게 만든 수백 개 깃발 행렬이 장관을 이룬다. 해넘이에 맞춰 길놀이가 펼쳐지고 큰 북을 치며 한 해를 보내는 제사를 지낸다. 이어 마을로 내려와 노래와 춤, 이야기판에 판굿 해남줄굿 씻김굿 등으로 놀다가 자정이 되면 달집 태우기와 불꽃놀이로 판막음을 한다. 새해 첫날은 띠뱃놀이로 해를 맞는다.
"처음엔 찾아온 손님들에게 돼지고기와 술을 대접하는 인정 나누기로 시작했지요. 워낙 사람이 몰려 들어와 잘 데도 없으니 밤에 모닥불 가에서 먹고 놀고 하라고요. 올해도 돼지 여섯 마리 잡고 불 피울 도라무통 30개, 막걸리 100통 장만했습니다. 굴 고구마 김도 구워먹고 할 겁니다. 동방예의지국에서 서로 베푸는 인정이 메말라서야 쓰겄습니까."
땅끝마을이 북적대기 시작한 것은 198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면서부터. 그 전에는 버스가 하루 두 세 대 밖에 안 다니고, 주로 고기잡이로 먹고 살았다. 지금은 고기잡이 겸 횟집이 25가구, 나머지는 장사를 한다. 식당이 18개, 모텔이 4개, 민박이 20집에다 새로 두 군데 모텔과 호텔을 짓고 있다.
김 이장은 "관광명소가 되고나니 옛날 같은 소박한 맘이 변하기도 했지만, 본심은 그대로다"고 하면서 "땅의 끝이자 시작인 이곳에 작은 소망을 갖고 찾아와 새 희망을 갖고 가시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전남 해남 현황 2002년 현재
인구 9만 2,817명 3만 5,256 세대
면적 859.92㎢. 논 14.2%, 밭 19.6%, 임야 53.6%, 기타 26.8%
위치 동쪽에 강진군, 북쪽에 영암군, 북서로 목포시, 남동쪽에 완도군, 남서쪽에 진도군
행정구역 1읍 13개 면
산업분포 농가 1만 8,475 가구 4만 5,322 명 어가 3,427 가구 5,806 명 제조업체 547 도소매업체 1,769개 숙박·음식업소 1,098개 건설업체 549개 광업체 23개 기타
예산 2,018억 원
명소 우항리 공룡 화석지, 우수영 관광지, 고천암·영암호 철새 도래지, 두륜산 대흥사, 달마산 미황사, 땅끝마을, 녹우당(고산 윤선도 고택) 등
특산물 쌀 고구마 겨울배추 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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