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백색의 화엄(華嚴) 속에서 그대에게로 가는 길을 잃고 말없이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대에게로 가는 길이 모두 지워진 뒤 그대와 나 사이의 거리(巨離)가 얼마나 아득한지 보고 싶었습니다.'시인 정일근(44·사진)씨가 산문집 '유혹'(새로운눈 발행)을 펴냈다. 정씨가 인터넷 홈페이지(www.ulsan21.com)에 연재한 편지 모음이다. 그의 글을 읽게 될 '그대들'을 위해 정씨는 편지를 썼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내내 정씨는 몸으로 겪은 자연과 가슴으로 느낀 사유를 적어서 인터넷에 올렸다. 이 글을 모아 펴낸 책에는 직접 찍은 사진도 함께 실렸다. 새 책은 엄밀하게 말해 산문이라기보다는 단상에 가깝다. 시인인 그는 풍경에서 순간의 착상을 낚아 글로 옮긴다. 그것은 시적이다. 겨울비가 내린 뒤 젖은 나무를 보고 집의 나무벽을 떠올린다. 한때 뿌리 내리고 살았었던 그 나무 벽이 겨울비에 '나이테를 풀면서 호흡하는 소리'를 듣는다. '내 몸에 나이테처럼 그대 사랑이 새겨졌기에 그대의 호명에 나는 언제나 큰 소리로 대답합니다. 내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나는 비오는 날의 나무처럼 온몸으로 대답하겠습니다.'
정씨가 그대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주제는 사랑이다. 누구나 어느 때엔가 한번쯤 만나봤을 혹은 어느 때엔가 갑작스럽게 찾아올 사랑은, 흰 눈처럼 순결하고 붉은 꽃처럼 유혹적이다. 유월 어느날 시인이 붉은 꽃에서 본 사랑의 유혹. '그대에게 가는 길, 산딸기나무의 가시에 피 흘리고 또 유월의 뱀들이 똬리를 틀어막고 있지만 나는 저 붉은 유혹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한 방울 한 방울 붉은 피로 밝혀놓은 등불 나는 그 불빛에 눈멀어 그대에게로 갑니다.'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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