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71)와 이불(38).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박씨와 신세대 미술의 대표 주자 이씨의 작업은 2002년 한국 미술의 성과와 흐름을 집약할 만했다.박씨는 올해 국내외에서 5차례의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다. 3∼7월 갤러리현대와 박여숙화랑에서 '묘법(描法)' 시리즈 신작전,갤러리세줄에서 월드컵 기념 드로잉전을 연 데 이어 6월 파리에서 판화전을 열고 9월에는 대구에서도 신작을 선보였다. 한지를 재료로 한 추상으로 한국의 전통과 정체성을 현대미술과 접목시킨 작업이었다. "스스로의 작업을 베껴먹는 데서 벗어나는, 평생에 걸친 지속적 자기부정이 없다면 예술가는 추락하고 만다"는 그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 머리를 박박 밀고 여전히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냈다.3∼5월 로댕갤러리에서 열린 이불의 근작전은 한국미술 첨단의 상상력을 보여줬다는 호평을 받았다. '사이보그'와 SF영화에서 나올법한 '몬스터' 설치, 기괴한 여전사의 복장을 하고 스스로의 사진을 찍은 '히드라', 1인용 노래방 부스 등 키치적 대중문화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한 그의 작품들은 거꾸로 대중문화적 현실 및 남성중심 이데올로기, 하이테크 시대에 대한 강한 비판과 냉소를 담았다. 많은 평자들은 이 전시회를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로 꼽았다.
월드컵 개최와 맞물려 2002년 미술계에서는 유난히 많은 대형 전시 행사가 열렸지만 대부분 혹평을 면치 못했다. 광주비엔날레(3∼6월) 부산비엔날레(9∼11월) 미디어시티―서울(9∼11월) 등 비엔날레 형식의 국제전들이 잇달았다. 월드컵을 전후해서는 깃발미술제(5∼6월) 바벨2002(6∼8월) 등이 기획됐다. 4회를 맞은 광주비엔날레, 부산청년비엔날레와 바다미술제를 통합해 새로 출범한 부산비엔날레는 전시 내용과 행정 양 면에서 "한국 미술계에 이런 형식의 비엔날레 개최가 과연 필요하고, 적절한가"라는 회의론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영상미술 비엔날레인 미디어시티―서울도 프랑스의 지성 보드리야르를 초청해 강연회를 여는 등 나름의 차별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숙한 행사 진행으로 내실을 기하지 못했다는 평가였다.
미술시장의 계속되는 침체 속에서 경매는 다소 활성화했다. 박수근의 유화 '초가집'이 3월 경매에서 4억7,500만원에 팔렸고, 5월에는 '아기 업은 소녀'가 5억500만원에 낙찰돼 잇달아 기록을 경신했다. 4월에 대규모 회고전이 열린 데 이어, 10월에는 강원 양구군에 박수근미술관이 건립되는 등 박수근은 올해도 한국미술의 상징이었다. 박수근미술관 외에 서울 김흥수미술관(4월) 서귀포 이중섭전시관(11월) 서울 김종영미술관(12월) 등 작가의 이름을 단 전시공간들이 잇달아 문을 열었다. 청전 이상범과 최영림, 류경채, 도상봉 등 작고한 대가들의 기획전도 관심을 모았다.
일반 대형 전시로는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근대미술 100선'과 호암갤러리의 '근대의 한국미술-격조와 해학' '한국 미술 명품전' 등이 주목받았다. 황규태, 배병우 사진전과 가나아트가 두번째로 개최한 사진·영상 페스티벌 '지금, 사진은', 샌프란시스코미술관의 소장품을 들여온 '미국현대사진 1970∼2000' 등은 예술로서의 사진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자극했다.
조덕현, 오치균, 양만기씨 등 젊은 작가들은 신선한 아이디어와 치열한 작가정신이 돋보이는 전시회로 주목받았다. 김상유(3월) 박고석(5월) 유영국(11월) 화백이 세상을 떠나 미술계를 아쉽게 했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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