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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후 민심기행 / (下) 호남→대전→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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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후 민심기행 / (下) 호남→대전→강원

입력
2002.1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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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풍(盧風)의 진원지 목포에서 출발했다. '세살만 돼도 민주당, 민주당 한다'는 광주 전주를 지나, 대선 행정수도 이전 공약의 주무대였던 대전을 거쳤다. 정부의 대북정책을, 명분이 아닌 통·반장 행정을 통해 느끼며 산다는 강원 군사마을 인제까지 국토의 최장 사선(斜線) 축을 따라 선 지역들. 지역과 성향에따라 선거 결과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지만, 세상이 변한 만큼 사람도 정치도 달라져야 한다는 요구와 기대는 한결같았다.■목포·광주

"아직도 그 얘긴가. 아따, 이제 그만혀." 일손이 바빠 짜증기마저 내비치는 얼굴들이지만 대선 얘기만 나오면 화색이 돈다. 서해안 고속도로 종점 표지판을 지나 10여분. 전남 목포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만난 회사원 박정수(49·목포시 용해동)씨는 한 마디로 '기분이 왔다'라고 했다. "막판에 표가 막 올라가는디 우리도 깜짝 놀랐당게. 선상님(DJ)이 당선됐을 때도 지금 기분만 못했지라."

다도해 뱃사람들이 모이는 목포 북항도 대선 승리의 흥분을 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여그서는 누구든 만나 주고 받는 인사가 '노무현 짱'이지라." 가슴까지 올라온 고무장화를 신은 30대 인부는 엄지를 곧게 펴 보였다.

횟집을 하는 김연희(52·여·원산동)씨는 "배고픈 사람 속은 배 곯아 본 사람이 아는 벱이여, 거그(노 당선자)가 가난했잖어. 우리 맴 아는 이가 됐다니께 얼마나 고마워."

맘 먹으면 다 주고 말지, 찔끔찔끔 주지는 못하는 게 호남 민심이란다. 또 '거시기가 선상님 밑에서 고생했응게 밀어줘야 헌다'는 사람도 있고, '적어도 두 번은 (정권을)잡아야 뭘 혀도 헌다'싶어 민주당 찍었다는 이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몰표'가 조금은 겸연쩍지만, 결코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게 대다수 호남인들의 항변이었다.

"노무현이가 누구여, 경상도 사람 아니여. 소신 지키다가 고향에서 쫓겨나고 동교동것들 헌티도 팽당한 이잖여. 당보고 찍은 것이 아니라 사람보고 찍었당게. 그것을 지역감정이라고 허믄 섭하제." 북항 여객터미널에서 만난 손모(49)씨는 "몰표 나오니까 또 지역감정이라고 허는디, 생각해보소. 고향사람 챙겼으면 후보경선서 리틀DJ(한화갑) 찍지 부산사람 찍었겄소."

그들 역시, 그렇다고 쳐도, 그렇게 높게 나올줄은 몰랐다고 했다.

■광주

광주 고속버스터미널 앞에서 만난 택시기사 유종석(34)씨는 "민주당 실망표가 권영길쪽으로 제법 기울어 노무현 표가 70%나 될까 싶었는데 뚜껑을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는 "막판 정몽준 캠프의 '뻘짓거리'가 오히려 지역 정서와 위기감을 자극해서 투표율도 높이고 표도 몰아버린 것"이라고 풀이했다. 실제로 투표 전날까지 조용하던 동네에서도 당일 부녀회에서 나와 길 가는 젊은이들 붙들고 투표를 종용했다고 했다.

개중에는 경상도 대통령이 호남에 오히려 득이라는 솔직한 셈속을 내비치기도 했다. 주부 김모(45·목포시 만호동)씨는 "호남정권 5년 동안 덕본 건 서해안고속도로 개통이 빨리 된 것 하나 뿐"이라고 했다. "딴은 선상님이야 고향 사람이라 마음 놓고 퍼 줄수 있었겄소만, 이제 노무현씨가 됐응게 좀 챙겨 주겄지라."

■전주 "당 사람들도 정신 채려야 헐틴디"

전주 시내 곳곳에는 유권자들의 변함없는 의리와 '몰표'에 감사하는 민주당 지역구의 플래카드로 어지러웠다. 하지만 주민들의 반응은 '대선은 대선, 당은 당'이었다. "저게 다 뭔 속없는 짓잉가 몰러. 자기들 이뻐서 찍어줬다고 착각허는 거랑게." 전주 남문시장에서 만난 40대 상인은 "대통령 취임하믄 민주당부터 몽땅 물갈이해줬음 쓰겄다"고 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에서 동조의 일갈(一喝)들이 얹혔다. "30년 넘게 썩은 정치인 집합소 아니여. 한나라당허고 뭐가 달라." "DJ도 욕먹을 건 먹어야 혀. 5년 동안 여기저기 눈치나 봄서 헌 게 뭐 있어." "측근이고 뭐고, 더러운 짓거리 헌 놈들 모두 잘라야 헐 것이요." 그래서 노무현 당선이 더더욱 다행이라고도 했다. 도청 앞에서 전통찻집을 하는 주인 김모(45·여) 씨는 "만일 이번 선거에서 졌으믄 다음 선거땐 민주당 후보라면 또 말뚝만 꽂혀 있어도 찍었을 것"이라며 "이제는 내 사람으로 대통령을 맨들었응게 나머지는 사람봐서 찍을란다"고 했다. 음식점에서 만난 한 대학생의 표심도 전주 정서의 큰 줄기와 닿아 있었다. 그는 "권영길을 찍으려다가 막판에 바꿨는데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고 했다.

―왜 후회한다는 건가.

"민주당 거들먹거리는 꼴 보기 싫어서요. 막판 정몽준 변수 때문에 이회창이 될까봐 노무현을 찍었는데 여유있게 이겼잖아요. 결과적으로 전북이 또 민주당 표밭처럼 돼버렸구요."

―어찌됐든 90%이상 몰표가 나왔는데.

"최소한 30%는 허수(虛數)일 겁니다. 최악을 모면하기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었던 거죠."

같은 테이블의 나머지 이들도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전주가 전통적으로 총선 무소속 당선자가 많은 곳입니다. 이제 민주당도 꿈에서 깰 때가 지났습니다."

■대전 "색깔이 없더니 그게 색깔이었어"

한때 JP의 아성으로 통했지만 지난 지자체 선거 때는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긴 현 시장을 뽑아 세인들을 놀라게 한 곳이 대전이다. 이를 두고 동구 용전동 버스터미널 앞에서 음식점을 하는 김모(50)씨는 3김정치를 가장 먼저 청산한 곳이 대전이라고 했다. 그는 "그래도 이번 선거만큼은 대전시민 스스로도 결과를 잘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회창씨가 충청도 출신이어서가 아니라, 전통적 정서가 한나라당에 가까웠는데 무려 15%포인트의 표차로 노무현 지지표가 많았던 것.

한 시민은 "자민련 의원들이나 시의원들이 왕창 한나라당으로 옮긴 것도 나름대로 다 민심을 저울질 해보고 그랬던 것 아니었겠느냐"며 "이번 결과는 대전 선거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대전시청 공무원 최모(37)씨는 "행정수도 이전이 이변의 최대 변수임은 틀림없으나 '다른 뭔가'가 있을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그 '다른 뭔가'를 변화와 개혁에 대한 대전 유권자들의 열망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았다. 즉, 무주공산의 새로운 정치 지도자로 개혁주자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동구 원동 중앙시장에서 만난 상인 정순임(47·여)씨는 "꿍쳐 논 땅 한 뙈기 없이 배추나 떼다 파는 우리 같은 서민들에게 수도 이전이 뭔 대수겠냐"고 했다. 그는 "노 당선자가 눈치 덜 보고 소신 챙겨가며 정치 했다기에 찍었다"며 "한 살이라도 젊은 사람이 해야 뭘 바꿔도 제대로 바꾸지 않겠느냐"고 했다. 곁에서 채소를 뒤적이던 50대 아주머니도 "(JP를 의식한 듯)고향 내세우는 사람 믿다가 충청도가 아직 이 모양 아니냐"며 "대학 못 다닌 사람이니 학연도 덜 따질 테고, 고향에서 인기 없는 사람이니 지연도 덜 챙길 것"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대덕밸리에서 만난 한 30대 연구원은 "지역을 기준으로 한 과거의 정치 잣대는 일부 지역 일부 계층을 제외하면 이제 무의미해졌다"며 "국민들이 먼저 알고 이번 투표에서 실천한 것인데 정치인들만 모르고 있다가 충격을 먹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강원 "약속만 지킨다면 누가되든 어때"

성탄일 강원 춘천 중앙로 일대는 나들이 인파로 활기가 넘쳤다. 하지만 대선 열기는, 인근 중앙시장의 냉랭한 경기마냥 상당히 식은 뒤였다. "선거 끝난지 언젠디 자꾸 물어, 나 2번이야. 편하게 생긴 게 우리 큰 아들놈 같아서." 좌판을 두고 앉은 할머니(72)는 "근디 누가되면 뭐해. 여기 봐, 손님이 없잖아. 우리야 장사 잘되게 해주는 대통령이 최고지"라고 했다. 지난 대선에 이어 이번에도 이회창을 찍었다는 옆 좌판 아주머니(50)는 "섭섭하지만 아이들이 잘된 거라고 하고, 또 거기가 서민 챙겨줄 사람이라고 하니까. 몰라, 지켜봐야지"라며 얼버무렸다.

투표 전까지는 이 곳도 살벌했다고 했다. 근화동에서 슈퍼마켓을 열고 있는 정모(35)씨는 "나이 따라 편들이 갈려서 삿대질까지 간 예가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막상 선거 끝나고 나니 언제 그랬는가 싶다"며 "그게 실상은 우리 서민들의 생활 아니냐"고 말했다. 중앙로에서 30년째 복덕방을 해왔다는 70대 원모씨는 선거 얘기는 아예 꺼내지 말라는 표정이었다. "젊은 것들이 암것도 모르고 날뛰더니 컴퓨터 게임하듯 대통령을 뽑아놨어. 한 갑자(60년)도 못 산 사람에게 나라 살림을 어떻게 맡겨." 그의 욕설과 한탄과 비애를 섞은 혼잣말 같은 푸념은,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이 5분을 넘기고 있었다. 가게를 하는 정모(35·근화동)씨는 "나도 많이 고민했다. 권영길씨를 찍으려다 막판에 정몽준씨 지지 철회를 듣고 노무현씨를 찍었다. 무엇보다 북미 관계를 잘 풀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춘천을 떠난 버스가 2시간 넘게 달려 도착한 북방 군사도시 인제 역시 분위기는 별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주민들은 노 당선자의 대북관에 거는 기대가 남달랐고, 그런 지역 정서가 선거에도 먹혀 들었다고 분석하고 있었다. 터미널에서 만난 회사원 이모(41·인제군 상동리)씨는 "한나라당에서 나오기만 하면 당선이라던 것도 이제는 옛말"이라며 "강원도도 군인상대 장사에서 벗어나 멀리 내다보기 시작한 것"이라고 눈에 힘을 줬다. 그는 "지금이야 여기가 우리 땅 끝이지만 통일만 되면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곳"이라며 노 당선자 우위로 나타난 표심의 저변을 풀었다. 저녁 반주가 과했던 듯 말 꼬리가 꼬이던 30대 후반의 회사원은 "여기서는 눈 뜨면 마주치는 게 자식 같고 동생 같은 군인들"이라며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그렇게 빠졌다는데 누가 선뜻 표를 주겠냐"고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구멍가게 주인 김모(51) 씨는 "북한을 죌 때는 죄야 큰 일이 안터지는데 지금처럼 너무 풀어놓으면 크게 당할 수도 있다"며 노 당선자가 너무 가볍게 생각한다고 불안해 했다.

터미널 앞에서 숙박업을 하는 이모(58·여)씨는 "마음은 1번인데, 주위에서 다들 노무현이 낫다고 하길래 눈 질끈 감고 2번 찍었다"고 했다. "우리야 뭘 아나, 또 누가 되든 어때. 자기가 한 약속만 지켜주면 고맙지."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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