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요? 우리에게 그런 것 물어보면 큰 실례됩니다."성탄절 이브인 24일 오후 서울 구로동의 서울조선족교회(담임목사 서경석· 徐京錫)에 모인 300여 재중동포들의 표정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해마다 연말이면 잠시나마 고된 타향살이의 시름을 잊던 이들이지만 올 크리스마스는 유난히도 쓸쓸하다. 정부의 강력한 불법체류자 규제조치로 내년 3월 말까지 강제출국 해야 하는 대다수 동포들은 "하루하루가 초조하고 막막할뿐"이라며 고개를 떨궜다.
지난해 7월 3개월 관광비자로 한국에 온지 한 달도 못돼 섬유공장에서 오른손 다섯 손가락이 모두 절단되는 사고를 당한 강정자(姜貞子·46)씨는 "손가락이 없으니 일자리도 얻기 힘든 처지"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지난해 한국에 함께 온 남편이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중 사고로 숨진 김현숙(金賢淑·56)씨는 "지난해 크리스마스에는 서로 선물도 나눠주며 즐겁게 지냈지만 이제 서너달 후면 빈손으로 귀향할 생각을 하니 한숨만 나온다"고 말했다.
재중동포들의 집단주거지인 구로구 가리봉1동의 조선족타운에도 연말이면 북적대던 인파가 사라진지 오래다. 환전소를 운영하는 황모(34)씨는 "불법체류자 단속이 심해 동포들이 다들 숨어지내기 바쁘다"고 귀띔했다. 건축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는 재중동포 이모(37)씨는 "작년 연말엔 술을 마시며 향수를 달랠 수 있었지만 올해는 일거리가 줄어 함바식당에서 밥 먹기도 힘들다"고 푸념했다. 귀금속상을 운영하는 김윤호(金潤鎬·38) 사장은 "작년 이맘때는 시계,반지,귀걸이를 선물하려는 동포들이 줄을 이었지만 올해엔 추석 이후 매상이 뚝 끊겼다"고 재중동포들의 어려워진 형편을 전했다.
한국에 와서야 뒤늦게 기독교에 눈을 뜬 재중동포들은 이날 저녁 가리봉동, 가산동, 독산동 등지의 조선족타운에서 촛불성가행진을 벌이며 '아기 예수탄생'의 의미를 되새겼다. 22일 자선음악회를 열어 거둔 성금 250만원 전액을 구로지역 소년소녀 가장 30명에게 기증하기도 했던 이들은 '기쁘다 구주오셨네'등의 캐럴을 부르며 적막한 골목에 사랑의 메시지를 전했다.
함께 행진에 나선 최황규(崔晃圭) 목사는 "동포들이 요즘처럼 서러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지만 이들 모두 성탄절을 맞아 '1년만 더 머물게 해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잃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서경석 목사는 "동포들이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당선자에게 거는 기대가 사뭇 크다"며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동포들에게 새희망을 줄 수 있는 크리스마스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준택기자 nag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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