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해 한국스포츠는 어느 때보다 진한 감동을 쏟아냈다. 한일월드컵 4강 신화에 이어 부산아시안게임에선 북한신드롬이 거셌다. 역전 재역전 드라마를 연출한 프로야구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갈채를 보냈고 마라톤 영웅 손기정 옹의 서거에 눈물을 흘렸다. PGA 투어 2승 최경주의 샷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온 국민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각본 없는 드라마를 5회에 걸쳐 연재, 한해를 정리한다. /편집자주
6월의 감동은 거스 히딩크 감독이 총지휘한 숨막히는 연작 드라마였다. 그 드라마는 해피 엔드로 막을 내렸고 지구촌은 깜짝 놀란 채 박수를 보냈다. 반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짜릿함이 온몸을 감쌀 만큼 여운이 진하다.
폴란드와의 1차전에서 황선홍이 첫 골을 터뜨리며 4강 신화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한국은 포르투갈마저 1―0으로 꺾고 국민 염원인 16강 진출을 일궈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태극전사 앞에 세계 최강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여전히 굶주려 있다"는 히딩크 당시 대표팀 감독의 말처럼 한국은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연파, 4강 무대를 밟았다.
스페인과의 8강전 승부차기서 마지막 키커 홍명보의 슛이 그물에 꽂히는 순간 환희와 감동은 절정에 달했다. 거리와 광장은 온통 붉은 옷으로 뒤덮였고 한반도는 '대∼한민국' 함성으로 메아리쳤다. 4,300만 겨레는 애국심에 눈물을 훔쳤다.
기적 같은 4강 신화의 한복판에는 네덜란드 출신의 히딩크 감독이 있었다. 2000년 1월 부임한 히딩크는 '오대영' 별명이 말해주듯 숱한 좌절과 실패를 딛고 국민영웅으로 우뚝 섰다. 한국민은 이방인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에 울고 웃었고 그는 '킬러본능' '멀티플레이어' 등 유행어를 쏟아내며 꿈과 용기를 북돋웠다.
히딩크는 단순한 축구감독이 아니었다. 온 국민의 열정을 한 데 묶은 정치지도자이자 치밀한 계획과 준비로 목표를 성취해낸 최고경영자(CEO)였다. 학연과 지연을 파괴한 실력지상주의와 과학적 훈련, 강적과 싸워야 강해진다는 등의 철학은 사회 전분야에서 '히딩크를 배우자'는 신드롬을 낳았다.
그의 축구이론을 접목한 경영학 서적이 줄을 이었고 대학마다 '히딩크 강좌'가 인기를 끌었다. 서울시청 앞 광장 등을 가득 메운 채 '히딩크'를 연호하면서도 한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은 붉은 응원 물결은 시민사회의 에너지로 승화됐다.
'히딩크 대통령'이라는 플래카드가 자취를 감춘 지금 히딩크는 네덜란드의 PSV아인트호벤을 이끌고 있다. 돈벌이에 급급한다는 비난이 나오는 등 인기도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한국축구의 기초를 다진 데 만족한다. 나머지는 한국인들의 몫"이라는 그의 마지막 충고는 아직도 우리 귓가에 맴돌고 있다.
/이종수기자 j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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