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대 노무현'의 대결이 아니라 구세대와 신세대, 주류와 비주류, 이성과 감성의 총체적 대결이었다. 그렇다면 노무현을 당선시킨 힘은 무엇이었을까. 원용진 서강대 신방과 교수는 "어느 키워드 하나로 상황을 정의하면 정치적 결정이 마치 아이들 장난처럼 비쳐질 수 있다"며 '단정론'에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20, 30대 유권자들이 유례없이 뜨거운 관심을 보인 이번 선거는 분명 정치 참여세대의 변화를 가져오며, 동시에 선거전에서 뚜렷한 정서적 차이를 보여온 것이 사실이다.■2002년 문화코드―눈물
최근 우리의 감성 코드는 분명 '눈물'이다. 올해 5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상반기 최고 흥행작이 됐던 영화 '집으로…'로 시작, 지능 박약 아버지의 양육권 투쟁을 그린 외화 '아이 엠 샘' 등 최근 히트작은 국적을 불문하고 눈물을 자극한 영화들이었다. 올해 최고 관객을 동원한 '가문의 영광'은 조폭영화임도 불구하고 동생 결혼식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오빠들을 설정, '웃음+눈물' 전략을 구사했다. "조폭영화인데도 눈물이 난다"는 게 관객들의 반응. 제작사 역시 "후반 눈물 전략이 주효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올해는 유독 '눈물'문화가 폭발적 반응을 일으킨 게 사실. 최고 베스트셀러인 '괭이부리말 아이들', 드라마 '겨울 연가'는 이런 '감성 마케팅'의 산물이다.
대선 캠페인에서도 '눈물'은 주효했다. 문성근의 지지 연설을 보며 흘린 노무현 후보의 눈물은 그 어떤 정치적 수사보다 위력을 발휘했다. '억지 웃음'은 가능해도 '거짓 눈물'은 불가능하다는 게 네티즌의 생각이다.
■기타 치는 대통령
영화 '피아노 치는 대통령'은 한마디로 감성적이고, 대중과 호흡하는 대통령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가 대선에 특별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노후보측은 곧 '기타 치는 대통령'이란 컨셉트로 영화를 벤치마킹했다. 물론 이 역시 '노사모' 회원의 아이디어로 '강성' 이미지 후보를 젊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개선하는 데 큰 보탬이 됐다.
박재동의 만화로 제작된 TV 광고 4편 '겨울 서정'도 환경미화원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눈물' '감동' 등의 반응을 끌어냈고, '부산 자갈치 아줌마' 역시 '노무현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는 것으로 시작, 어느 찬조 연설자보다 소박하고, 푸근한 느낌으로 유권자의 감성에 파고 들었다.
■메인 스트림 vs. 언더그라운드
기존의 언더그라운드 문화였던 휴대전화와 인터넷이 우리 사회 여론 생산의 메인 스트림이었던 기존 언론과 일시적으로나마 위상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진보의 기치를 내걸기는 했지만 기성세대들이 보기에 딴지일보는 20대들의 치기어린 말장난으로 도배된 다른 인터넷 사이트와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러나 대선 경쟁이 본격화하면서 딴지일보는 오마이뉴스에 버금가는 '정치적 매체'가 되었다. 아무리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고 해도 이 사이트에 습관적으로 접속하던 네티즌들이 '정치 바람'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활자 매체 중심의 기존 언론에 비해 훨씬 다양한 컨텐츠로 제공되는 인터넷과 휴대 전화의 정보는 이들 매체를 제1의 소통 도구로 삼고 잇는 네티즌들의 '감성'에 가장 잘 맞는 매체이다.
■콤플렉스 없는 세대의 '패거리 문화'
'인터넷이 개인을 파편화시킨다'는 일반적 정의는 우리나라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유행에 민감하며, 한 가지 가치관에 몰입하기 싫어하고, 다른 이들과 구분되기를 즐기는 네티즌들은 조밀한 인터넷 네트워킹을 통해 동계 올림픽 당시 오노 망언규탄 월드컵 광화문 응원 SOFA 개정을 위한 광화문 촛불시위 등에서 엄청난 결집력을 보여 주었다.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를 이용해 '광화문에서 보자' 는 메시지를 주고 받는 신세대들은 훨씬 자유롭게 무리를 지어 광장으로 몰려 들었고, 노무현 지지 세력이 됐다. '나는 느낀다. 고로 행동한다'는 신세대의 강령이 대선에서도 위력을 발휘한 셈이다.
소설가 현기영(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씨는 "군중 심리가 아니라 민중의 엔진이 폭발한 사건"이라고 일련의 신세대 '파워'를 분석했다. 이런 경향은 정치적 콤플렉스가 강했던 70, 80년대의 시위나 부정적 의미로 쓰였던 한국의 '패거리 문화'를 질적으로 변화시킨 경우다. 다원화되고 훨씬 자유로워진 우리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시인 김용택씨 역시 " '광장 문화'는 동학운동과 4·19, 80년대 저항운동으로 면면히 이어왔지만 최근의 젊은이들은 '무언가 끌린다'는 '감성'이 건드려질 때 비로소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젊은 파워와 감성이 만나 선거의 이변을 만들어냈다는 분석이다. 결국 신세대의 정치 파워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분산됐던 이들의 힘이 동계올림픽, 월드컵, 반미 시위 등 잇달아 '감성'을 자극하는 계기를 만나면서 폭발적으로 그 힘을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김지영기자 kimjy@hk.co.kr
■특별기고
세대의 자유로운 감수성이 경직된 기성정치에 균열을 일으켰다. 극적인 반전과 서스펜스로 막을 내린 '대선'이란 한편의 드라마를 보며 느낀 개인적인 소감이다. 국민경선과 후보단일화, 그리고 지지철회 사태에서 극적인 승리의 전선을 가로질러간 노무현의 정치적 오디세이는 놀랍게도 관행과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감수성의 자원을 내장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노무현의 승리가 젊은 세대의 승리, 인터넷의 승리, 소신과 원칙의 승리로 설명한다. 또한 지역주의와 보스정치의 몰락, 관권, 금권정치의 소멸을 앞당겨 새로운 정치개혁의 상징적 사건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노무현 승리의 표면적인 요인을 일반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내재된 사회적 에너지의 근원을 밝혀내는 것이다. 우리는 노무현 승리의 요인으로 세대정치와 인터넷 정치를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노무현 승리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20, 30대가 과연 동일한 정치적 입장과 태도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소비의 황태자'요, '혁명의 금치산자'였던 청년세대들이 돌연 정치적 아나키스트로 돌변했다고 볼 수 있을까.
이러한 일반화된 요인들이 노무현 승리의 필요조건일 수는 있어도 충분조건은 아니라도 본다. 386세대가 주를 이룬 '노사모'의 정치개혁 의지와, 변화와 속도로 무장한 디지털 N세대들이 연대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세대적 공감대 때문이 아니라, 현실정치를 산화시키려는 감수성의 정치 때문이다.
감수성은 몸에서 배어 나오는 열정의 에너지이고 감각의 자율성이다. 정치적 이해관계와 예측 가능할 법했던 변절의 꼼수들이 여지없이 무력화한 것은 낡은 몸의 관습들을 바꾸려는 감성의 힘, 욕망의 에너지가 젊은 세대 간에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무현의 승리는 정확하게는 청년세대가 아니라 감수성의 승리이며, 인터넷 테크놀러지가 아니라 그 테크놀러지를 관통하는 주체의 자율성의 승리이다.
문화적 감수성은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조율할 수 있는 힘이며, 노무현 스스로가 말한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가능케하는 에너지이기도 하다. 문화가 정치에 종속되고, 감수성이 이성적 논리에 의해 미신으로 배재되는 사회는 이제 우리가 탈주해야 할 근대적인 영토이다. 바보 노무현에게 던진 한 표는 이제 좀 사람답게 살자는 감정의 열망이 담겨있다. 극적인 반전에서 발견되는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은 바로 감수성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 감성의 자율성, 감각의 해방, 정서적 연대야말로 21세의 우리 사회의 코드이고, 이번 대선이 안겨준 중요한 교훈이 아닐까.
이 동 연 문화평론가 문화연대 사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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