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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정계은퇴… 파란의 정치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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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정계은퇴… 파란의 정치인생

입력
2002.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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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가 20일 정계를 떠났다. 1997년 12월18일 15대 대선에서 1.6% 차이로 쓴 잔을 마신 그는 5년 뒤 또 다시 간발의 차이로 주저 앉았다."이 길이 합당치 않으면 제쳐 주시고, 그렇지 않다면 나라와 국민을 위해 뛸 수 있도록 붙잡아 달라"는 간절한 기도는 끝내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1996년 1월 신한국당 15대 총선 선대위원장으로 정계에 발을 디뎠다. '대쪽 판사', '성역을 타파한 감사원장', '소신 총리'를 끝으로 야인으로 돌아간 그의 팔을 김영삼(金泳三) 당시 대통령이 잡아 끌었다.

그때까지의 60년 인생이 탄탄대로였다면 그날부터 6년 11개월의 정치 인생은 부침의 연속이었다. 그는 모두가 부러워할 성공을 이뤄내는 듯하다가 결정적 순간에 무너졌다. 정치 입문 후 1년 7개월 만에 여당인 신한국당의 대통령후보가 됐지만 IMF 관리 체제라는 국가적 위기와 장남의 병역 면제 의혹에 발목이 잡혔다.

그에 대한 기억이 녹슬어 가던 1998년 8월 그는 한나라당 총재로 되돌아왔다. 그에게는 자신조차 미처 몰랐던 끈질긴 생명력이 있었다. 2000년 16대 국회의원 공천에서 김윤환(金潤煥) 이기택(李基澤)씨 등 당내 중진을 대거 탈락시켜 당 조직을 직할체제로 정비한 뒤 거대 야당을 한 손에 움켜쥔 채 2년을 기다렸다.

야당 총재로서 그는 총풍(銃風) 세풍(稅風) 안풍(安風) 등으로 끊임없이 정치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나 강력한 장외투쟁 등의 정면 돌파로 위기를 벗어났다. 2000년 총선 대승, 각종 재보선 및 지방선거 압승 등을 이끌어 야당 대통령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러나 정권의 집요한 흠집내기로 그는 상당수 국민에게는 선거를 위해 안보 불안을 불러 일으키고, 국세청과 안기부의 검은 돈을 받은 부패한 정치인의 모습으로 비쳤다. 올 초에 터진 호화빌라 파문은 여전히 국민의 뇌리에 남은 이런 이미지와 병역 의혹 등과 겹쳐 '귀족 이회창'이란 딱지까지 만들었다.

또 다시 국민의 심판대에 서야 하는 그로서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는 '낮은 곳'을 택했고, 그의 말대로 땅 바닥을 뒹굴며 위를 쳐다보았지만 그 굴레를 완전히 벗지는 못했다. 게다가 전혀 예기치 못한 암초에 부딪쳤다.

곧 허물어질 것 같았던 민주당이 국민경선이라는 드라마를 만들어 내 노풍(盧風)을 몰고 왔다. 노풍은 '이회창 대세론'을 눈 깜짝 할 사이에 뒤흔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노풍이 잠잠해 지자 이번에는 후보 등록일 직전에 후보단일화 바람이 불었다.

단풍(單風)은 노풍과 달랐다. 변화를 원하는 젊은 유권자들의 폭발적인 참여로 좀처럼 잦아 들지 않았다. '이회창 대세론'은 끝내 역전에는 미치지 못했다. 2002년 12월 한국 사회는 안정보다는 변화를 원하고 있었다.

'법과 원칙이 바로 선 나라', '사람의 존엄과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그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는 은퇴 회견에서 당원들에게 "정계에 들어 올 당시의 꿈을 이루지 못한 회한이 어찌 없겠느냐"며 "또 다시 가시밭길을 걷게 해 죄송하다"고 굵은 눈물을 떨구었다. 가야할 때를 아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하지만 이날 그의 퇴장은 처연함이 더했다.

그의 볼을 타고 흘러 내린 굵은 눈물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회한과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에 다름 아니었다.

/최성욱기자 feel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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