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대선패배 충격에 20일 이회창(李會昌)이라는 강력한 구심점을 잃은 한나라당은 그야말로 망연자실한 분위기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느냐"는 자책, 앞으로 겪어야 할 '야당 5년'과 당 존립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기 어려운 혼돈이 온통 당을 뒤덮고 있다. 선거 패배 후 있을 법한 지도부 인책론을 제기할 기력조차 상실한 모습이다.이 후보의 정계은퇴 선언 후 여의도 당사는 관객이 한꺼번에 빠져 나간 쓸쓸한 공연장을 연상케 했다. 김영일(金榮馹) 사무총장, 이상배(李相培) 정책위의장은 사퇴서를 제출, 당무가 마비됐다.
한 후보 보좌역은 텅 빈 사무실에서 몇 시간 째 무표정한 얼굴로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 당직자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아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다"며 "허탈감이 갈수록 더해 언제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이런 가운데 서청원(徐淸源) 대표는 이날 고위당직자 회의에서 당의 향후 진로에 관한 두 가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첫째는 조기 전당대회 추진이고, 둘째는 강력한 대여(對與) 견제다. 물론 서 대표는 사견임을 전제했고, 이날 회의가 이들 문제를 공식 논의할 자리도 아니었지만 현실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서 대표는 2004년 5월로 잡혀있는 전당대회를 내년 2월말 새 정부 출범 전으로 앞당겨 실시, 당 면모를 일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최고위원은 임기가 1년 이상 단축되는 데 불만을 가질 수 있으나 이번 대선에서 확인된 변화 흐름을 함께 타고 넘지 않으면 활로가 없다는 당 저변의 압력이 커질 가능성이 높아 결국 수용될 것이란 관측이다.
서 대표는 또 "새 정권에 협력하겠다"면서도 "현 정권의 각종 비리를 파헤치는 데 소홀하다면 저항을 받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예상되는 정계개편 회오리로부터 당의 울타리를 지키려면 여권과의 긴장을 높여 대내 결속을 유도하는 게 최선이라는 점에서 이 역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유성식기자 ss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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