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盧武鉉) 후보의 당선은 기성 세대에 대한 젊은 세대의 승리, 제도권에 대한 비제도권의 승리, 정치인에 대한 국민의 승리다. 이번 선거는 또한 여론조사의 승리라고도 할 수 있다. 불리한 여론조사 결과를 받아 들여 후보단일화라는 승부수를 띄운 노무현 후보는 승리했고, 여론조사 결과를 믿지 않고 '숨은 표'의 환상에 안주한 이회창(李會昌) 후보는 패배했다.그 동안의 한국일보의 여론조사를 종합적으로 분석할 때 이번 대선의 핵심은 역시 세대간 대결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공식선거 운동이 시작되면서 20·30대의 노무현 지지는 더욱 늘어 이회창(李會昌) 지지의 거의 2배에 달했고 그런 추세는 선거 당일까지 이어졌다.
선거일 전날 밤 국민통합21 정몽준(鄭夢準) 대표의 전격적 지지 철회 선언이 아니었다면 노 후보는 5% 포인트 이상의 표차를 기록했을 것으로 분석됐다. 정 대표의 지지 철회 선언은 젊은 세대의 투표율 저하를 불러 왔다. 반드시 투표하겠다는 적극적 투표 의사층은 꾸준히 늘어 선거 전날에는 82.5%에 달했다. 연령대별 적극적 투표의사 등을 감안한 판별분석에서는 투표율이 73% 이상 돼야 노 후보에게 유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실제 투표율이 70.2%에 그쳤는데도 노 후보가 승리한 것을 보아 막판에 부동층의 상당수가 노 후보 지지로 돌아선 것으로 이해된다.
11월 중순께만 해도 노 후보의 당선을 점치는 유권자는 5% 미만이었고 이 후보의 당선을 예상하는 사람은 80%에 육박했다. 그만큼 이 후보는 제도 정치권의 '안정된' 후보였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 보면 노 후보는 특정 정치 세력에 빚진 게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후보단일화를 위해 손잡았던 정 대표마저 전격적 지지 철회 선언으로 노 후보의 부담을 해소해 주었다. 노 후보는 자신을 지지해 준 유권자에게만 빚을 진 셈이다.
한국일보 여론조사에서 노 후보 지지층은 일관되게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을 포함한 보다 자주적이고 대등한 대미 관계를 원했고 대북 관계에서는 강경책보다는 온건 유화책으로 기울어 있었다. 이런 경향은 앞으로 출범할 노무현 정권의 대미·대북 정책 기조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20·30대가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우선 3월부터 민주당 국민경선이 생중계되면서 노사모 회원들의 환호하는 모습이 자주 TV에 등장했다. 노 후보는 젊은층이 지지할 만한 후보라는 이미지가 심어지기 시작한 계기였다.
보다 큰 정치적 의미를 갖는 것은 월드컵 축구대회 당시의 응원열기다. 한국대표팀이 16강, 8강, 4강으로 승승장구하면서 전국을 휩쓴 응원열기의 정치적 수혜자는 정 대표였지만 후보단일화를 통해 거의 그대로 노 후보에게로 옮겨졌다. 서울 광화문과 시청 앞 광장 등에 거리응원을 하러 나온 젊은이들은 87년 6·10 항쟁 이래 처음으로 정치적 동원을 경험했다.
젊은이들이 "대∼한민국" 과 "오 필승 코리아" 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어 대며 경험한 것은 자신들이 속한 정치 공동체에 대한 자기 동화 과정이자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거리응원은 거대한 정치 사회화 현장이었다. 정치 공동체에 대한 자기 동화와 자부심은 흔히 정치인을 통해 표출되지만 우리 정치인들은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들은 대신에 거리응원을 통해 이를 표현했다.
주로 20·30대 젊은 네티즌이 중심이 된 붉은 악마와 노사모는 공통점이 많다. 학연 지연 혈연 등 기존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활발히 의견을 교환해 공동체를 마련하고, 온라인의 참여를 오프라인의 참여로 이어간다. 이들은 미군 장갑차 사건을 계기로 촛불 시위로 다시 한번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했다. 여론조사에서 이들의 상당수는 노 후보 지지자들인 것으로 드러났다.
노 후보 승리의 또 다른 요인은 TV토론과 광고 등 홍보 전략에서 이긴 것이다. 그는 짧은 기간에 이 후보에 비해 훨씬 인간적 매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심는 데 성공했다. 투표 전날 이뤄진 한국일보 여론조사에서 그는 20·30대는 물론 40·50대에서도 인간적 매력에서 이 후보를 앞섰다. 이런 결과는 미디어를 이용한 이미지 메이킹이 앞으로의 선거에서도 위력을 발할 것임을 예고한다.
김주환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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