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봄여름가을겨울이 데뷔하기 전까지는 재즈는 소수의 음악이었다. 재즈를 아는 사람은 있어도 듣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물며 퓨전 재즈는 이름조차 낯설었다.퓨전 재즈라 불린 봄여름가을겨울의 음악은 무어라 딱히 집어낼 수 없지만 참신하고 세련돼 다른 음악과 뚜렷하게 구별되었다. 노랫말 역시 사랑 일변도였던 당시 노래들과 달랐다.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 봐 그래 나도 변했으니까/모두 변해가는 모습에 나도 따라 변하겠지'하는 데뷔곡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 봐'는 화자의 자의식과 타인에 대한 관조가 엿보였다. '어떤 이의 꿈'(89)에서 올 초 발매한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이르기까지 마치 누군가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느낌. 냉소가 배어있는 듯 하지만 끝은 희망과 낙관이었다.
긴 이름과는 달리 멤버는 김종진(40·기타, 보컬) 전태관(40·드럼) 단 둘. 하지만 음반에 연주곡을 3곡이나 실을 정도의 밴드였다. 오히려 김종진의 보컬은 결코 노래를 잘한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술 한잔 걸치고 편하게 내뱉는 듯한 목소리가 묘한 매력을 지녔다.
시작이 록 연주자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록을 들으며 연주자의 꿈을 키웠다. 김종진은 키스, 전태관은 레드 제플린을 좋아했다. 재즈는 음악을 깊이 듣게 되면서 접하게 되었다. 김종진은 "재즈는 자유로운 음악이라는 점에서 록과 맥이 닿으면서도 섬세하고 연주력의 비중이 큰 음악"이라고 설명한다. 재즈에 전자 악기를 결합한 퓨전 재즈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재즈에 관심이 많았던 싱어송라이터 김현식을 만나 85년부터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로 활동했다. 당시 멤버는 다섯 명. 하지만 87년 김현식이 대마초로 구속되자 박성식(키보드) 장기호(베이스) 두 사람이 떠나고 달랑 둘만 남았다.
두 사람은 그냥 평소 듣고 싶었던 음악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무작정 김현식의 소속사였던 동아기획을 찾아갔고 김 영 사장은 두 말 없이 음반을 내주기로 했다. 김 사장은 "두 사람이 하고 싶은 음악에서 새로운 패션을 읽었다"고 한다. 그것은 단지 퓨전 재즈라는 장르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듣고 싶었다던 음악은 바꿔 말하면 이제까지 들었던 다양한 외국 음악이었다. 록과 재즈가 그 중심이었다. 하지만 굳이 한국적으로 다듬을 생각은 없었다. 태생적으로 미국 음악을 받아들여 자기화해온 한국 록의 역사에서 이전까지의 음악인들이 주로 한국적 정서를 염두에 두고 한국화에 힘을 쏟았다면 봄여름가을겨울은 반대로 오리지널을 충실히 소화하는 데 우선 순위를 두었다. 스스로를 "퓨전 재즈 밴드가 아니라 그냥 퓨전 밴드"라고 규정하는 이들은 "외국 음악을 이것저것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한국 대중 음악은 어차피 '섞어찌개'가 될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가능한 한 원재료의 맛을 살리고 싶었다"고 한다. 새로운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 많은 음악인들이 봄여름가을겨울 식의 접근법을 따르기 시작했다. 새롭고 세련되며 남들보다 앞선다는 생각 때문에 외국 음악에 심취했던 당시의 젊은이들도 흔쾌히 그들을 받아들였다. 이제는 굳이 외국 음악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봄여름가을겨울은 이미 시작된 외국음악과 한국음악의 대역전에 일조했다.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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