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재벌그룹의 모(某) 부장은 요즘 대선 후보 진영의 경제 인맥을 파악하느라 눈코 뜰새 없이 분주하다. 며칠 전에는 'N후보 진영의 공개된 인물말고, 진짜 인맥을 알아내라'는 그룹 오너의 특명을 받았다. B기업의 임원도 얼마 전부터 주변 인사들을 대상으로 비슷한 탐문 활동을 하고 있다. "두 유력 후보 중 한쪽 인맥은 웬만큼 알만한데, 다른 쪽 진영은 드러난 인물마저 거의 없어 애를 먹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닷새 앞으로 다가온 대선이 치열한 접전 양상을 띠면서 기업들이 정치풍향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과거 대선에 비해 단풍(單風), 미풍(美風), 북풍(北風) 등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터져 대선판도가 더욱 불투명해진 것도 큰 이유다.
판도를 가늠할 수 있는 여론조사기관의 후보지지율 조사내용을 입수하거나, 후보 진영의 숨은 실세들을 찾아내기 위한 정보전도 따라서 더 치열해질 수 밖에 없다. C기업의 한 과장은 "매일 4∼5개 기관에서 실시한 후보 지지율 결과를 입수해 분석한 동향파악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며 "귀동냥이 쉽지 만은 않다"고 말했다.
대선 판세가 극도로 불투명해지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특정 후보에 기울어 있던 기업들과 경제관련 단체들은 최근 다시 '중립'으로 돌아선 모습이다. 지난 여름만 해도 기업들은 누구를 지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지원하느냐 하는 '방식의 문제'로 고민했다. 노골적으로 지원할 것인가, 아니면 은근슬쩍 지원할 것인가 하는 기술적 고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삼성·LG 등 대부분 그룹들은 공연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정치나 선거와 관련된 공개적인 말은 아예 하지 않고 있다. 물론 기업마다 후보에 따라 엇갈리는 사업상 득실계산이나, 기업들의 특정 후보에 대한 근본적인 호·불호 성향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예컨대 정몽준 의원과 노무현 후보의 연대가 강해지면서 정 의원이 오너인 현대중공업과 경쟁관계에 있는 기업들은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다.
또 현 정권에서 사업의 제약이 많았거나, 오너가 수치를 당한 기업들은 기본적으로 반대편 후보를 지지하는 분위기였으나 최근 이런 기류가 다소 완화한 듯한 모습이다. 특정 후보가 당선되면 반대로 불이익이 예상되는 기업들도 마찬가지 양상이다. 한때 내부적으로 S그룹과 H그룹은 이회창 후보를, 다른 H그룹과 G그룹은 노무현 후보를 절대적으로 지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 기업들은 최근 들어 "잘못 알려진 것이며,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고 해명하고 있다.
기업들은 한편 설비투자계획 등 경기 호재성 사업계획을 차기 정권에 대한 '선물'로 준비, 최대한 발표를 미루고 있다. 당선자가 확정된 뒤에 설비투자 등 화려한 경영계획을 밝혀야 경기회복에 앞장서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 생색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임원진 인사도 새 정부 인맥에 닿는 인물들을 포함하기 위해 되도록 늦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태규기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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