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박빙의 승부이거나 전세가 불리할 때 대통령 후보들이 단골로 들고 나오는 소재는 경제 문제다.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전에서 민주당 빌 클린턴 후보는 걸프전의 성공을 등에 업고 재선을 노리는 조지 부시대통령에 맞서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라는 구호를 내걸어 불리했던 판세를 뒤집었다. 미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후보가 1980년 선거에서 유권자들에게 던진 질문은 "여러분은 지금 4년 전보다 더 잘 살고 있습니까?"였다. 카터 정권의 경제정책 실패를 집중 공격한 레이건은 이 캠페인 구호를 앞세워 백악관에 진출할 수 있었다.눈을 멀리 돌릴 것도 없다. 5년 전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내건 슬로건은 '준비된 경제 대통령'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원조를 요청하며 나락으로 떨어진 한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경제적 식견이 탁월한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는 호소였다. 당시만 해도 철옹성으로 여겨졌던 보수진영의 강력한 저항을 뚫고 진보적 색채가 짙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배경을 경제적 요인을 빼놓고 달리 설명하기 힘들다.
경제문제가 항상 대선의 주요 변수가 되는 것은 정부의 경제정책이 유권자들의 생활과 미래에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여론조사 때 마다 국민들이 경제 대통령을 뽑겠다고 말하는 것도 좀 더 나은 생활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이번 대선도 예외는 아니다. 전체 유권자의 38%가 대선 후보들에게서 경제회복 및 안정화 대책을 가장 듣고 싶어한다는 최근 여론 조사도 이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실제 선거운동은 이 같은 여론을 반영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진행됐다. 경제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해묵은 정치적 쟁점과 네거티브 선거전이 판을 쳤다. 선거가 일주일도 안 남았지만, 경제문제가 이슈화한 것은 엊그제 경제분야에 대한 합동 TV토론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후보들은 깊이 있는 토론보다 수박 겉핥기식 공방으로 일관해 후보별 차별성을 드러내지 못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가계부채·비정규직 근로자·벤처문제등에서 거의 같은 의견을 보였다. 무역개방·쌀 문제·자유무역협정(FTA)분야는 아예 의견이 일치했다. 도대체 어디가 여당이고 어느쪽이 야당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책에 차별성이 없다. 경제정책에 대한 거시적 비전 제시는 물론이고 설득력 있는 정책대안도 나오지 않았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11일 대선 후보들의 공약 비교·분석자료를 내면서 "후보간 유사한 공약이 많고 실현 가능성과 일관성에서 의문이 제기된다"고 지적할 지경이다. 이쯤되면 누구를 믿고 나라의 곳간을 맡겨야 할 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내년 국내외 경제가 박빙의 선거 판세와 마찬가지로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는 점이다. 한국은행은 내년도 성장률을 5.7%로 제시하고 있지만, 국내경기가 올 해 처럼 내수중심의 성장세를 이어갈 수 있을 지는 극히 불투명하다.
저금리 기조는 계속 유지될 것인지, 세계 정보기술(IT)경기는 오랜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미국은 이라크와 전면전을 벌일 것인지 등 불확실한 요소가 너무 많다. 미국 경제의 재침체 우려, 부동산 거품의 향방, 위험수위에 달한 가계부채 문제 등 각종 위험 요인들이 지뢰처럼 깔려 있다. 대선주자들이 통계숫자 몇 개 외워서 모법 답안을 말하는 식으로는 산적한 경제 현안을 처리할 수 없는 것이다. IMF신탁통치를 거치면서 국민들의 경제적 안목과 기대치는 엄청나게 높아졌다. 이제 국민들은 단순한 경제 대통령을 넘어 비즈니스 마인드를 갖춘 최고경영자(CEO)형 대통령을 원한다.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서라도 대선주자들은 경제 공부를 더 해야 한다. 경제현안에 대한 대안 제시보다 과거문제에 집착하거나 네거티브 선거전에 몰두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후보들이 유권자에게서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라는 말을 들어서야 될 일인가.
이 창 민 논설위원 cm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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