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매립장에서 썩어가는 여자 시신과 그녀가 낳은 아이의 시체가 발견된다. 밤이고 비오는 날이다. 시경 강력반 여형사 미연(염정아)과 신참내기 강 형사(지진희), 그와 계급이 같은 노장 박 형사(성지루)가 도착한다.연쇄살인범을 쫓는 영화에 나오는 형사들의 조합이 그렇듯 미연은 리더답게 냉정하고 날카롭다. 반면 강 형사는 터프하고, 감정과 의욕만 앞선다. 둘 사이의 완충 역할이자, 관객들의 긴장을 이따금 풀어주는 역할의 박 형사는 당연히 능글맞고 약간 코믹하고, 그러면서 '짬밥' 많은 형사답게 노련하다.
사건이 오리무중인 것도 잠시. 이어 버스 안에서 한 여자가 배를 난자 당한 채 살해되자 미연의 예리한 분석력은 1년 전 살인 6건을 저지르고 마지막 시체를 가방에 넣어 들고 시경을 찾아와 자수한 사이코 신 현(조승우)을 모방한 범죄임을 간파한다. 그 사건의 충격으로 미연의 약혼자인 한 형사는 자살을 했다.
성질 급한 강 형사는 신 현의 사주라고 단정하고,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그를 만나지만 '양들의 침묵'의 렉터(앤서니 홉킨스)의 냄새를 풍기는 그에게 대꾸도 못하고 당하고 만다. 신 현이 누구를 사주했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 그러는 사이 세 번째, 네 번째 살인이 일어난다. 사건의 진상은 무엇일까?
'H'는 아주 천천히 작지만 중요한 단서들을 조금씩 드러내는 방식으로 추리와 혼란을 유도한다. 신 현의 "영혼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어라" "부정한 영혼에서 옮겨온 피" "생명을 함부로 한 어리석은 인간에 대한 분노" 등의 말, 그를 치료한 신경정신과 의사, 피해자가 모두 여자이라는 점, 강 형사의 출신배경과 네번째 살인부터 나타나는 이상한 상황들. 그것들이 퍼즐처럼 다 맞춰질 때 비로소 사건의 진상이자 영화제목 'H'의 뜻도 밝혀진다. 물론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네번째 살인에서 그 낌새를 알 수 있다.
'H'는 할리우드 영화의 캐릭터와 구성을 모방하고 있긴 하지만 스릴러물로서의 반전, 결말은 나름대로 매력적이다. 조승우의 싸늘한 미소도 인상적이다. 문제는 영화를 지나치게 느리고 감상적인 분위기로 끌고 가 연기자도 관객도 지쳐버리게 만든다는 것. 이 때문에 상처와 분노를 내면화하지 못한 지진희의 연기가 눈에 더욱 거슬린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인 신인 이종혁의 감독 데뷔작이다. 19일 개봉.
● 연쇄살인범역 조승우
역시 그의 가장 큰 매력은 미소다. 2년 전, 신인으로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 에서 멀리서 춘향을 지켜보던 이몽룡의 그 흐뭇한 미소, '후아유'에서 사고로 수영 선수생활을 그만둔 이나영을 포근히 감싸는 듯한 미소.
조승우(22)의 그 미소가 'H'에서는 싸늘하게 바뀌었다. "신 현은 연쇄살인범에 사형수이지만 흔들림이 없이 평온합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고, 형사들보다 훨씬 철학적인 존재입니다. 상황을 즐기는 것이죠."
미소는 그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해맑은 청년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끔찍한 연쇄살인범이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악한 모습의 인간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선입견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H'에 뒤늦게 합류한 조승우는 형사 역을 맡은 배우들과의 긴장을 위해 일부러 그들과 친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촬영중인 곽재용 감독의 '클래식'까지 하면 6편. 짧은 기간치고는 꽤 많은 작품이다.
"흥행과 상관없이 모두 마음에 들었어요. 배역도 다양했고요. 행운이죠."
/이대현기자 leed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