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표 나눠주기는 어느새 아침 일과가 돼있었다. 매일 아침 할당된 초등학교 앞에서 시간표를 배포하다보면 모나미 물감과 왕자파스의 인지도가 쑥쑥 올라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린이들이 학교 앞에 서있는 나를 먼저 알아보고 시간표를 달라고 줄을 섰다. 문구점 등 소매상들의 성화도 빗발쳤다. 모나미 물감과 왕자파스를 사면서 어린이들이 "왜 시간표를 안주느냐"고 떼를 쓴다는 것이었다. 나는 시간표 제작량을 늘려 소매상들에게 공급하라고 지시했다. 시간표 나눠주기는 광신화학이 성공한 첫번째 마케팅 사례였다.내가 시간표 나눠주기에 정신이 팔려있던 어느 날, 대학 동창이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왔다. "어이, 삼석이 자넨가"로 시작된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아침에 출근하다가 장충초등학교 입구에서 자네랑 똑같이 생긴 사람을 봤어. 학교 앞에서 어린 학생들한테 뭘 나눠주고 있던데 말야. 언뜻 자네하고 닮았길래 자세히 보니 정말 비슷하더라구. 처음엔 자네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래도 명색이 우리나라 최고 학부를 나오고 기업 임원으로 있는 사람이 아침 일찍 길거리에 나와 아이들을 상대할 까닭이 없지 않나. 그래서 그냥 지나쳤는데, 세상에 그런 닮은 사람이 있다는 걸 자네도 알아두는게 좋을 것 같아 이렇게 전화를 했네. 시간 나면 그 장소에 한번 가보지 않겠나." "자네 닮은 사람이라고 했나. 이보게, 사실은 닮은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이 바로 날세, 나."
그 친구가 나를 못알아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요즘이야 은행장도 길거리에 나가 홍보 전단을 나눠주는 시대가 됐지만 당시로서는 기업 임원의 '거리 마케팅'이 희귀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시간표 마케팅과 함께 모나미 물감과 왕자파스, 더 나아가 모나미의 어린이용 문구가 업계 최고 상품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해준 이벤트가 있었는데, 바로 소년한국일보의 어린이 미술대회였다.
1960년 7월 창간한 소년한국일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일간 신문으로서 당시 각 초등학교와 교사, 학생들로부터 큰 관심과 인기를 끌고 있었다. 소년한국일보는 창간 첫 해부터 전국 규모의 어린이 미술대회를 개최했는데, 광신화학은 64년 5회 대회부터 소년한국일보와 공동 주최하게 됐다. 회사 이름은 70년대 들어 모나미화학, (주)모나미로 바뀌었지만 미술대회는 86년 27회 대회때까지 23년 동안 계속 개최했다.
그렇게 된데는 아동문학가로 당시 소년한국일보 주간이었던 고(故) 조풍연(趙豊衍) 선생과 시인으로 소년한국일보 기자였던 고(故) 김수남(金秀男) 전 소년한국일보 사장의 권유와 영향이 컸다.
전국 규모의 어린이 미술대회는 당시 장안의 화제였다. 64년 5회 대회만 해도 서울 등 전국 19개 도시에서 5만2,379명이 참가했다. 지방 학생들은 각자 그림을 그려 작품을 냈지만 서울 학생들은 경복궁이나 남산, 장충단공원, 효창공원 등지에서 열린 야외 현장 대회에 참가해 작품을 제출했다.
심사가 끝나면 매년 7월쯤 장충체육관에서 시상식을 가졌다. 70년에는 파격적으로 우수 학생 30명에게 부상으로 일본 여행의 기회를 주기도 했다. 매년 미술대회와 시상식에서 모나미 문구를 손에 쥐고 즐거워 하던 어린이들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마 그들은 지금쯤 우리 사회의 동량(棟梁)이 되어 있으리라. 미래를 이끌어 갈 어린이들이 최고 품질의 문구를 쓸 수 있도록 해주는 일, 나는 그것이 기업인인 내게 주어진 사명이자 숙명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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