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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의무로서의 투표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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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의무로서의 투표權

입력
2002.1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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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투표장에 들어서면 벽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이 걸려 있고, 그 밑에 투표함이 놓여있으며, 투표함 옆에는 자그마한 연필 하나가 놓여 있다. 유권자는 후보자에 대해 찬성하면 그냥 투표지를 넣고, 반대할 경우 연필을 집어 그 이름을 긋게 되어 있다. 비밀투표라며 투표장에는 커튼이 쳐져 있지만 항상 반쯤 열려 있고, 그 사이로 안내원인 감시원이 내부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언젠가 지방주권선거 때의 일이다. 투표장에 들어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반발심리가 생겼다. 연필을 쥘까 말까…. 마음 같아서는 연필을 확 쥐고 투표용지에 적힌 후보의 이름을 좍 그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순간 부모형제의 얼굴이 떠오르고 내 자신의 어두운 장래가 떠올랐다. 잠시 울컥했던 마음이 차분해 졌다. '나 하나의 마음을 숨겨 가족이 살 수 있다면 기꺼이 참자'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건 투표가 아니야! 이럴 바엔 투표 없이 그저 100% 찬성이라고 발표하면 많은 사람이 시간과 노력이라도 절약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자유로운 투표, 내 생각과 마음이 그대로 담긴 표를 투표함에 넣어보는 것이 한으로 맺혔다. 북한이 투표라도 제대로 했으면 오늘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다.

그 후 서울에 와서 한이 맺혔던 '제대로 된 투표'도 해 보고, 투표에 보이코트도 해 보았다. 사실 처음에는 이렇게 해도 괜찮은지를 시험해 보고 싶어서 그랬고, 나중에는 신뢰와 자신감을 갖고 그랬다. 투표장에서 나올 때마다 한이 풀렸다는 상쾌감과 함께 나도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 하고 있구나 하는 뿌듯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느끼는 안타까운 심정도 많았다. 나는 투표할 때마다 그렇게 감격스럽고, 무엇인가 해냈다는 긍지감이 몰려오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할까?

많은 사람들이 불평을 하고, 비판과 대안들을 내 놓으면서도 정작 투표일이 되면 왜 그렇게 많이 기권을 할까? 기권하는 것도 권리겠지만, 국가가 국민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민주국가라면 그 뜻에 국민의 마음을 실어야 하지 않겠는가. 기나긴 과거 독재정권 시기에 왜곡된 투표, 기권한 유권자가 많아서 결국 그 정권이 연장되었던 것이 아닐까? 투표는 하지 않으면서 불평불만 토로하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서글픔을 넘어 가증스러움마저 들 때가 있다. 한 쪽에서는 투표장이 있어도 뜻대로 투표할 수 없고, 한쪽에서는 뜻대로 투표할 수 있음에도 투표를 하지 않으니 이쪽도 저쪽도 모두 문제다.

더욱이 젊은 세대들에 기권자가 많다니 앞으로의 우리 미래가 국민의 뜻이 담긴 정권에 의해 관리될 것인지가 의문스럽기까지 하다. 방학을 맞아 투표보다는 해외여행을 먼저 생각하는 젊은이가 많다고 한다. 심지어 어느 대학에서는 투표일을 공휴일로 선포했음에도 학생들을 불러내 기말시험을 치른다고 한다. 전자는 극단적 개인이기주의의 표현이고 후자는 투표권을 빼앗는 범죄 행위이다.

이런 것을 보노라면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불쑥 튀어 나온다. "바라지 않는 정권에 의해 나라가 관리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여러분 손으로 바라는 정권을 선택하라"고. 선택은 남이 하게 하고 자신은 선택된 정권에 침이나 뱉고 욕설이나 하는 식으로는 나라도 변할 수 없고, 나라가 변하지 않아서 입는 손해는 고스란히 그들 자신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

선거는 우리에게 권리인 동시에 의무이다. 우리는 자신들이 그렇게도 혐오한다는 부정부패, 폭로, 학연·지연·혈연 등을 선거를 통해 없앨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번 대통령 선거야 말로 역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투표율을 보여 국민의 뜻을 드러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정통성과 도덕성이 있는 정권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북한에 대해서도 당당할 수 있는 정권을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조 명 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통일협력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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