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 인류를 둘러쌌던 괴상한 길짐승들도 있다. 그들도 날짐승처럼 인간에게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이 있다. 그리고 이해 관계를 초월하는 신성한 것이 있고 앞서의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그냥 그 자신의 특성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이로운 길짐승들은 질병을 치료하거나 흉한 일을 막아주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가령 서쪽의 전래산(錢來山)이라는 곳에는 생김새가 양 같고 말의 꼬리가 있는 암양(□羊)이라는 짐승이 있는데 그 기름으로 피부가 튼 것을 낫게 할 수 있었다 한다. 이 짐승은 사실상 고대 중국의 서쪽 중앙아시아 지역에 존재했던 대월지국(大月氏國)의 특산인 큰 양을 가리켰던 듯 하다. 이런 이야기는 거의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서쪽 중원에는 곤오산(昆吾山)이라는 곳이 있었다. 이 산은 불꽃 같이 붉은, 질 좋은 구리가 나서 그것으로 명검을 제작했던 유명한 곳이다. 이 곳에는 생김새가 돼지 같은데 뿔이 난 농지(□□)라는 짐승이 있었다. 농지는 울음소리가 마치 사람이 통곡하는 소리와 흡사했는데 이 짐승을 잡아 먹으면 가위에 눌리지 않았다고 한다.
가위에 눌린다는 것은 악몽을 꾸는 것을 말하고 이것은 심리적인 부조화 상태를 의미한다. 장자(莊子)는 일찍이 최고의 완성된 경지에 도달한 인간 곧 진인(眞人)은 잠을 자도 꿈을 꾸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이 완전히 통합되어 조금도 심리적 갈등이 없는 상태일 것이다. 고대인이 진인은 아닌 이상 심리적 갈등이 없을 수 없다. 놓쳐버린 사냥감에 대한 안타까움, 근처 다른 부족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 등 생존을 위한 활동에서 생긴 긴장감이 있을 것이다. 심리적 갈등이 극대화하면 미치게 된다. 북쪽의 양산(陽山)이라는 곳에는 생김새가 소 같으며 꼬리가 붉고 목에 난 혹살의 모양이 술 푸는 구기와 같은 짐승이 있었다. 이름을 영호(領胡)라고 하는데 그 울음은 이름 소리와 같았다. 이 짐승을 잡아 먹으면 미친 병을 낫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배가 나와 고민하는 사람은 북쪽 단훈산(丹熏山)의 이서(耳鼠)라는 짐승을 잡으면 해결할 수가 있다. 이 짐승은 쥐 같이 생겼는데 토끼 머리에 고라니 몸을 하고 소리는 개 짖는 것 같으며 꼬리로 날아다녔다. 이것을 잡아 먹으면 배가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온갖 독을 물리칠 수도 있었다. 여기서 배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부종(浮腫) 등에 의해 병적으로 커진 배를 빠지게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흉한 일을 막아주는 길짐승들이 있다. 남쪽의 청구산(靑丘山)이라는 곳에는 여우 같이 생기고 꼬리가 아홉 개가 달린 짐승이 있는데 어린애 같은 울음소리를 내고 사람을 잘 잡아 먹었다. 그런데 이것을 잡아 먹으면 요사스러운 기운에 빠지지 않았다. 이 짐승이 바로 구미호(九尾狐)이다. 아마 고대인은 구미호가 어린애 같은 소리를 내서 사람을 홀려놓고 잡아 먹는다고 상상했던 것 같다. 명(明) 나라 때의 소설 '봉신연의(封神演義)'에서 은(殷) 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이 나라를 망치는 데에 적극 협조한 애첩 달기(□己)는 구미호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주왕을 홀려 무고한 사람들을 죽게 하고 밤이면 여우로 돌아가 그 시체를 파먹는다. 우리나라 민담에도 여우가 딸로 변신해서 일가족을 다 잡아 먹었다가 도술을 배워 귀가한 오빠에게 퇴치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시대에는 임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어떤 왕비가 무당을 시켜 여우 꼬리를 잘라 미약(媚藥)을 만들어 총애를 구하였다는 항간의 속설도 있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구미호의 신화 이미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쪽의 중곡산(中曲山)이라는 곳에는 말 같이 생겼는데 몸빛이 희고 꼬리가 검으며 외뿔에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을 한 박(□)이라는 짐승이 있었다. 이 짐승은 울음소리가 마치 북소리 같았고 호랑이와 표범을 잡아먹을 정도로 용맹했다. 이 짐승을 기르고 있으면 칼과 창 등 무기에 의한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길러서 이로운 짐승들이 여럿 있다. 평소 근심이 많은 사람은 굴굴(□□)이라는 짐승을 기르면 효과를 볼 수 있다. 중원의 곽산(□山)에 사는 이 짐승은 너구리 같이 생겼고 흰 꼬리에 말갈기가 있는데 기르면 어느 순간에 근심이 없어졌다 한다. 북쪽의 대산(帶山)이라는 곳에는 말 같이 생기고 갈라진 외뿔이 있는 환소(□疏)라는 짐승이 있는데 이것을 길러 화재를 피할 수 있었다. 질투심이 많은 연인에게는 유(類)라는 짐승을 잡아먹을 것을 권한다. 남쪽의 단원산(亶爰山)이라는 곳에 사는 이 짐승은 너구리 같이 생겼고 암수 한 몸인데 이것을 잡아 먹으면 신기하게도 질투심이 사라졌다 한다.
적극적으로 인간에게 복을 가져다 주는 길짐승들도 있었다. 가령 남쪽의 유양산(杻陽山)이라는 곳에는 말 같이 생기고 흰 머리와 호랑이 무늬에 붉은 꼬리를 한 녹촉(鹿蜀)이라는 짐승이 있었다. 이 짐승은 재미있게도 울음 소리가 마치 노래 소리 같았다. 이 짐승의 가죽이나 털을 차고 다니면 자식이 많이 생겼다 한다.
남쪽 바다 바깥의 적산(狄山)이라는 곳에 사는 소는 더 신기하다. 시육(視肉)이라는 이 소는 고기를 베어내도 금방 다시 생겨나서 종전과 마찬가지가 된다. 한(漢) 나라 때에 중국인들이 서쪽 멀리에 있는 대월지국에 갔을 때 그 지역에도 이와 비슷한 소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 소는 이름을 일반(日反·날마다 돌아온다는 뜻)이라고 하였는데 오늘 고기 서너 근을 베어내도 내일이면 고기가 다시 생기고 상처도 나아 있었다고 한다.
뭐니 뭐니 해도 고대인들의 가장 큰 소망은 풍요로운 수확일 것이다. 그 징조를 고대인들은 동쪽의 흠산(欽山)이라는 곳에 사는 당강(當康)이라는 짐승으로부터 읽었다. 이 짐승은 돼지 같이 생겼고 어금니가 있는데 나타났다 하면 그 해는 천하에 큰 풍년이 들었다.
흉한 일을 초래하거나 예고하는 불길한 길짐승들도 있다. 흉한 일 중에서도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 행위야말로 가장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길짐승 중에는 식인 동물이 많다. 그것들이 사방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서 고대인이 얼마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식인 동물 중의 압권은 북쪽의 구오산(鉤吳山)이라는 곳에 사는 양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눈은 겨드랑이 아래에 붙어 있으며 호랑이 이빨에 사람의 손톱을 한 포효(□□)라는 짐승이다. 이 녀석 역시 구미호와 마찬가지로 어린애 울음소리를 내어 순진한 척 사람을 꾀었다. 그런데 성질이 탐욕스럽고 포악하여 사람을 잡아먹고도 만족치 못하면 제 몸을 물어 뜯었다 하니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의 에리직톤에 비견할만 하다. 신에 대한 불경죄로 기아의 여신에게 들씌운 에리직톤은 탐욕의 화신이 되어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도 모자라 나중에는 제 몸까지 뜯어 먹는다.
이밖에도 갖가지 재앙을 일으키는 길짐승들이 있다. 남쪽의 장우산(長右山)이라는 곳에 사는 긴꼬리원숭이 같이 생겼는데 귀가 넷인 장우(長右)라는 짐승이 나타나면 큰물이 지고, 서쪽의 태화산(太華山)이라는 곳에 사는 여섯 개의 발과 네 개의 날개를 갖고 있는 비유(肥遺)라는 뱀이 나타나면 크게 가물었다. 은나라를 세운 탕왕(湯王) 때에 7년동안 가뭄이 든 것도 이 뱀이 나타난 후 생긴 일이라고 한다. 재앙 중에는 전쟁과 돌림병을 빼놓을 수 없다. 서쪽의 소차산(小次山)이라는 곳에 사는 원숭이 같이 생기고 흰 머리에 다리가 붉은 주염(朱厭)이라는 짐승이 나타나면 큰 전쟁이 일어났다. 동쪽의 태산(太山)이라는 곳에 사는 소 같이 생겼는데 흰 머리와 외눈에 뱀의 꼬리가 있는 비(蜚)라는 짐승은 정말 두려워할만 했다. 이것이 물을 지나가면 물이 말라버리고 풀을 지나가면 풀이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타나면 천하에 큰 돌림병이 생겼다.
길흉과 관계없이 신기한 짐승들이 있다. 남쪽 바다 안쪽에는 알록달록한 빛깔의 파사(巴蛇)라는 큰 뱀이 살고 있는데 이 뱀은 코끼리를 집어 삼키고 3년이 되어야 그 뼈를 내놓았다. 그런데 그 뼈를 약으로 먹으면 가슴앓이나 속병이 나았다고 한다. 북쪽 바다 안쪽의 임씨국(林氏國)이라는 나라에는 크기가 호랑이만 한데 오색 빛깔이고 꼬리가 몸 보다도 긴 추오(騶吾)라는 짐승이 있다. 이 짐승은 성품이 어질어서 산 것을 먹지 않으며 이것을 타면 하루에 천리를 갈 수 있었다 한다. 주문왕(周文王)이 폭군 주왕에 의해 감금되었을 때 신하들이 임씨국에 가서 이 짐승을 구해다가 바치니 주왕이 기뻐하여 풀어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북쪽 바다 바깥에는 말 같이 생겼고 몸빛이 흰 공공거허(□□距虛)라는 짐승과 앞은 쥐, 뒤는 토끼 같이 생긴 궐(蹶)이라는 짐승이 있는데 이 둘은 사이가 무척 좋았다. 궐은 체형이 앞뒤가 달라서 걸으면 항상 넘어졌지만 공공거허가 좋아하는 감초를 구해다 주므로 궐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면 공공거허가 엎고 달아났다 한다. 둘은 공생 관계였던 셈이다.
글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그림 서용선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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