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저녁 대전광역시 유성구 대덕과학단지내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자리한 벤처카페. 연구원과 벤처인들의 회합장소로 즐겨 이용된다는 이 곳에 40대 벤처 기업 CEO들이 스산한 겨울 칼바람 속에 하나 둘 모여들었다. 최근 만들어져 이날이 7번째라는 대덕밸리 벤처 기업인들의 이른바 월야(月夜·월요일 밤) 모임.오랜만이라는 인사를 나누는 벤처 기업인들의 얼굴 마다엔 만남의 화기애애함에 앞서 비장감이 뚝뚝 묻어났다. 대덕밸리 벤처연합회 차원의 미국 실리콘 밸리 방문 귀국 보고가 이날 모임의 표면적 주제였지만 심층에는 '대덕밸리의 위기'라는 고민의 공감대가 자리하고 있었고, 고민은 세워올린 코트깃 너머 벤처인들의 얼굴들을 잔뜩 굳혀놓았다. "하이테크는 시장이 좁을 수밖에 없는데도 기술만을 내세웠다.""더 이상 기술이 자식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뼈아픈 자성의 소리는 늦은밤 벤처인 회합의 장을 울렸다.
■"내년이면 절반만 남을지도 모른다."
1990년대 중반 움터 벤처 온풍의 수혜를 먹고 800개 벤처기업의 요람이 된 대덕밸리에선 최근 몇 달 사이 4개 업체가 잇달아 넘어졌다. '800중 4'라는 숫자는 외지인에겐 소슬바람이었지만 대덕밸리 벤처인들에겐 땀구멍을 파고드는 송곳 바람이었다.
유무선 통신관련 모듈 제조 업체였던 H사, 압전세라믹발전기와 피부미용기를 만들어온 K사, 부품 소재 전문업체인 또다른 H사, 유무선 전화기 개발업체인 O사 등. 코스닥 등록을 추진하거나 개발 상품이 국내외의 주목을 받아온, 대덕 밸리에선 잘 나간다던 업체들이었다.
90년대 말 창업해 이제 제품개발을 완료하고 본격적인 시장 검증에 들어간 대덕 밸리 벤처들의 평균적인 모습이었기에 남은 업체들에게는 위기의 신호탄으로 다가왔다.
대덕밸리 몇몇 벤처 기업들이 관련된 최근의 주가조작 관련 검찰 수사도 충격타였다. 한 벤처인은 "뭘 모르고 브로커 '장난'에 말려든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테헤란밸리의 일로만 여겨지던 모럴헤저드가 대덕밸리에도 자리했음이 드러난 것"이라고 고개를 떨궜다.
위기론의 확산은 결국 창업 열풍도 식혀버렸다. 올해 대덕밸리에서 창업한 벤처업체는 49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매년 150개씩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던 성장세는 고개를 숙였다. "내년 초면 800여 개 업체 중 절반이상이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있다"고 말하는 한 벤처인의 이마엔 주름살이 그려졌다.
■밤에는 연구용역, 낮에는 기술개발
실험실의 과학자가 사업가가 되기는 쉽지 않았다. 대덕밸리 벤처인의 70%라는 연구원 출신CEO 대부분의 사정이 그랬다. 안온한 연구실을 박차고 나오기 위해 자신을 다잡는 것은 물론 가족을 설득해야 했다. 자기 분야 최고였지만 경영은 기초가 안된 이들 태반이었다.
기술만이 든든한 밑천이었다. 친척·친구에게 빌린 사업 자금 몇 푼으로 컨테이너와 아파트 방구석에 사무실을 내고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밑천 때문이기도 했다.
몇 번의 자금 위기 속에 "눈물로 돼지저금통을 갈라 은행을 찾기도 했던"벤처인들은 자신의 기술이 대박 상품으로 빛을 보는 순간을 위해 밤을 지샜다. "당장 아무런 상품도 없고 재무제표 수치는 '0'인 상황에서 가능성만으로 투자 유치가 어려웠습니다. 연구용역을 따와 인건비와 기술개발비로 충당해야 했습니다." (G사 이모사장) 밤을 밝혀 연구 용역을 수행해 번 돈으로 직원들 월급을 줬고, 낮에는 기술개발에 매달렸다.
"테헤란밸리 벤처인들이 투자유치를 위해 룸살롱에서 밤을 지새는 동안 대덕밸리에선 실험실과 연구소에서 기술개발을 위해 밤을 지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덕넷 이석봉 사장의 말이다.
■"실컷 달려와 이제 막 이륙하려는데"
올해 초 미국에서 열린 통신기기 박람회에 한 대덕밸리 CEO는 시제품을 들고 자신감에 가득 차 날아갔다. 2년6개월에 걸친 고생이 하이테크로 녹아든 시제품이었기에 자신만만했다. "모두가 '괜찮네'라고만 하더군요. 하지만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들이 밤을 밝혀 개발해낸, 세상을 벨 것이라고 자신했던 '최고 기술'은 양날의 칼이었다.
제약연구소 출신 한 벤처인은 "'기술은 좋다. 하지만 상품이 될 수 있느냐'는 투자자의 질문에 머리가 아득해지더라"고 말했다. 시장은 '플러스 알파'를 요구하고 있었다. KAIST출신 한 벤처인도"마케팅 계획도 정보도 없이 시장의 입장에선 터무니 없을 기술을 과신했고, 몇 년간 그곳에 쏟아부었다"며 "그 자체가 또다른 형태의 거품이었다"고 토로했다.
강남 테헤란 밸리를 무너뜨린 벤처 한파는 그즈음 대덕밸리를 엄습했다. 은행에서 돈 빌리기가 쉽지 않았고 창투사도 고개를 돌렸다. "활주로를 달려 막 이륙하려는 순간에 연료가 가장 많이 든다더군요. 내수 경기가 죽어버린 데다 자금줄이 막힌 대덕밸리는 실컷 달려와 이륙을 못하는 꼴입니다."생명공학연구원 출신 벤처인은 이렇게 읊조렸다.
■그래도 사람이 희망이다
대덕밸리 기업체들의 입구와 벽 곳곳엔 '한국의 미래, 21세기 한국의 곳간 대덕밸리'라는 격문이 나붙어있다. 여전히 한국을 먹여 살릴 기술의 메카라는 자존심이 옹골차다.
"대덕밸리는 언제나 처럼 사람 하나로 커왔고 그 사람들은 위기를 극복해낼 것으로 믿습니다." 대덕밸리 벤처기업 연합회 백종태 회장의 자기주문이기도 하다.
최근 국내 굴지 통신회사 임원이 참석한 심포지엄이 충남대에서 열렸다. 강연이 끝나고 이 사람 저 사람과 환담하는 임원 옆으로 한 사람이 가방을 든 채 서 있었다. 임원의 비서가 아니라 대덕밸리의 박사 연구원 출신 벤처인이었고 그는 얼마 전 그 통신회사와 부품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 분위기에선 상상하지 못했던 '고개숙인 박사'는 대덕밸리 벤처인들의 마음가짐을 읽게 하는 대목이다.
또 다른 벤처인은 "대덕연구단지의 30년 축적된 하이테크와 몇 년간 밤을 세운 기술이 살아있다면 아무리 벤처라는 목욕물이 버려지더라도 첨단 기술이라는 아기는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10일 새벽 1시. 대덕밸리 KAIST내 동문창업관을 밝힌 불은 아직도 꺼지지 않고 있었다.
/대전=이동훈기자 dhlee@hk.co.kr
■ 대덕밸리 역사
정부출연연구소, 민간연구소 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 185개 기관, 1만6,000여 명의 연구원들의 보금자리인 대덕단지는 1973년 정부의 계획에 따라 탄생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헬기를 타고 다니며 직접 장소를 물색했다. 당시 충남 대덕군이었던 지금의 단지가 남한의 중간인데다 산으로 둘러싸인 구릉지여서 유사시 군사적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이 높게 평가됐다는 후문이다.
이곳에 '대덕밸리'라는 이름을 안긴 것은 90년대 중반부터 불기 시작한 벤처열풍이다. 과학자들은 IMF이후 본격화한 정부의 벤처 부양 정책을 등에 업고 하나 둘 연구원을 뛰쳐나와 창업 대열에 몸을 실었고, 96년 30개에 불과하던 벤처 기업은 2002년 800여 개로 늘어났다. '한국의 실리콘 밸리', '아시아 최고의 벤처 집적지', '아시아 R& D의 허브' 등 대덕밸리를 가리키는 별칭은 당시 과학자들을 설레게 했던 가능성의 격문이었고 대체로 평탄한 삶을 살아왔을 과학자들을 주저 없이 '모험'에 나서게 했다.
몇 년에 걸친 밤에 밝힌 연구개발은 결실로 이어졌다. 지난해 보안장비 전문업체인 아이디스를 시작으로 1,000만 달러 수출탑, 500만 달러 수출탑을 거머쥐는 업체들이 속속 탄생, 대덕밸리는 본격적인 수확의 꿈에 젖었다. 하지만 벤처 열풍이 잦아들고 내수 경기마저 꺾여들며 벤처기업들은 2002년 말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동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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