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 수입제한 조치가 내려지자 이용섭 사장과 나는 수입 의존형 체제로는 회사가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이 올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염료는 국내 생산업체가 없어 수입제한 조치에 묶이지 않았으나 그림물감과 크레파스는 사정이 달랐다.전쟁이 남긴 후유증 탓에 척박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자식에 대한 학부모들의 교육열은 뜨거웠다. 학부모들은 밥을 굶을지언정 자식만큼은 제대로 교육시키려 했다. 문구류 시장은 그래서 전망있는 시장이었다. 하지만 광신산업은 생산시설이 없었다. 반면 삼성 그림물감과 지구파스는 일찌감치 생산체제를 갖추고 시장을 잠식해 가고 있었다. 방법은 자체 생산체제를 갖추고 질 좋은 제품을 만들어 승부를 거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러나 생산에 관한 노하우도 없고 단 한명의 기술자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당장 사업 추진은 불가능했다. 그런 상황에서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브로커 곽모씨가 돌파구를 열어줬던 것이다.
그림물감과 크레파스는 색소와 왁스를 배합하고 색을 내는 작업이 매우 어려워 국내 기술자가 드물었고, 그나마 기술과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삼성 그림물감과 지구파스가 독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필운동 공장으로 향하는 이 사장과 나는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은 듯한 기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러나 기술자 손모씨가 운영한다는 필운동 공장은 한심했다. 한옥 마당에 쳐놓은 천막 아래에 드럼통 몇 개 갖다 놓고 동네 아주머니 20여명을 모아 수작업으로 그림물감과 크레파스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제품이 경쟁력을 가질 리 없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자체 생산·판매 사업에 나섰던 브로커 곽씨가 낭패를 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사장과 내게 다른 대안이 있을 리 없었다. 우린 손씨에게 "이런 원시적인 방법으로 제품을 만들게 아니라 좀더 체계적으로 제품을 만들어 보자. 우리가 자금을 대겠다"고 제안했다. 손씨가 마다할 리 없었다.
이 사장과 나는 우선 공덕동에 있는 창고를 임대했다. 그리고 1960년 2월 광신화학공업(주)를 설립했다. 기존 광신산업은 염료 수입업을 계속했다. 광신화학의 생산시설이라곤 100평 크기의 창고에 갖다 놓은 드럼통 몇 개와 장작불을 땔 수 있는 아궁이가 전부였다. 장작불로 드럼통에 불을 때며 색소와 왁스를 넣고 섞은 뒤 그림물감과 크레파스를 만들어냈다. 항상 불을 때야 했기 때문에 겨울에는 근무 여건이 나았지만 여름에는 찜통 속에서 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어수선하던 공장 분위기도 시간이 지나면서 잡히기 시작했고 창고 한 켠에는 사무실과 숙직실까지 들어서 제법 공장다운 모습을 갖췄다.
삼성 그림물감과 지구파스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질 좋은 제품을 만드는 길 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술자 손씨는 공장이 문을 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빈곤한 실력을 드러내곤 회사를 떠나고 말았다. 광신화학으로서는 자체 기술 연구·개발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마침 서울대 상대 선배의 소개로 서울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김유승씨를 공장장 겸 생산부장으로 영입했다. 당시는 서울대 출신이라도 취직하기가 무척 어려웠던 때라 우린 운 좋게도 핵심 인재를 손쉽게 채용할 수 있었다. 이어 한양대 화학과 출신을 연구과장으로 채용한 우리는 매일 그림물감과 크레파스를 만들어 놓고 일본 제품, 국내 타사 제품과 품질 비교 테스트를 하며 제품 질 개선을 추진했다. 그렇게 몇 달을 씨름한 끝에 광신화학공업이 만든 그림물감과 크레파스가 첫 선을 보였다. '남자는 평생 눈물을 세번 흘린다'지만 그날 나는 기쁨의 눈물을 맘껏 흘렸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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