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이용해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더러 허름한 간판에 쓰여진 색다른 볼거리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관광안내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지만 뜻밖의 감동을 안겨주는 곳을 만나기도 한다. 경기 강화도에 자리한 '은암 자연사박물관'이 바로 그런 곳이다.강화읍을 벗어나 유명한 '부근리(富近里) 고인돌' 유적 방향으로 48번 도로를 달리다 유적 못 미처 삼거리에 이르면 오른 쪽으로 뻗은 길 어귀에 박물관 푯말이 세워져 있다. 이런 외딴 시골에 자연사박물관이라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발동해 따라 들어가 본다. 어느 시골에서나 만날 수 있는 자그마한 옛 초등학교 운동장에 차를 세우고 이층짜리 낡은 교사(校舍)의 한쪽 끝자락 입구로 들어서니 퀴퀴한 마루바닥 냄새에 알코올 냄새가 한데 뒤섞여 어린 시절 학교의 표본실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페인트로 말끔하게 단장하였지만 낡은 구석이 역력한 교실 안의 조촐한 진열장 속에는 바다와 육지에 서식하는 조류, 동물류, 악어 등 파충류가 영상 자료와 함께 펼쳐져 있다. 복도를 거쳐 이어지는 다른 방에는 곤충류와 각종 조개류, 공룡알 화석, 보석의 원석 등이 오밀조밀 전시되어 있다.
소박한 시설에다 전시 체제도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우리의 열악한 박물관 문화 속에서는 단비 같은 반가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운동장 한 켠에 마련된 가게를 돌보던 안주인과의 대화 끝에 이곳 관장께서 원래 건축업을 하던 분으로 오래 전부터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수집해 왔다는 갸륵한 이야기를 들었다.
교육환경의 변화에 따라 문 닫는 벽지의 학교들을 이처럼 문화시설로 활용하는 것은 근년에 이르러 새로이 일고 있는 반가운 문화 풍속도이다. 몇 해 전에는 전남 영암군과 이화여대 박물관이 영암군 구림(鳩林)마을의 폐교된 한 초등학교를 개축해 만든 '영암도기 문화센터'가 문을 열었다. 1980년대 후반에 발굴된 부근의 가마터 유적과 연계해 이 지역에 자리잡은 월출산, 도갑사, 왕인박사 유적지 등과 함께 훌륭한 '문화벨트'를 이루고 있다.
이렇듯 하나 둘 버려지는 폐교가 문화시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건물의 재활용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다. 학교 건물이 제대로 보존되고 여기에서 새로운 문화가 재창출되는 것을 지켜보는 주민들에게 이 '모교'의 의미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신적 자산이 될 수 있다.
박물관 하면 흔히 전통문화와 직결되는 골동적 가치 부여에 연연하기 쉽다. 그러나 오늘날의 박물관이란 시공(時空)의 한계를 설정할 수 없을 만큼 그 범위가 거의 무한정하다. 지방자치단체의 경우 그 지방의 역사와 자연, 생태는 물론, 각종 산업과 관련된 모든 소재가 전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또 기업에서도 각기 그 고유한 전문성을 살려 기업의 성격과 관련된 자료로 특성화한 박물관을 세울 수 있다. 많은 이들의 관심 속에 참다운 박물관 문화가 우리 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기를 바란다.
지 건 길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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