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광신산업은 한국은행 맞은편 회현동 제일은행 본점 뒤편에 있었다. 근사한 빌딩이라고는 보기 힘든 시절, 이용섭 사장은 자신의 2층 집 아래층을 사무실로 꾸며 사용하고 있었다. 광신산업은 부산을 통해 일본에서 염료를 수입, 대구 등지의 염색공장에 공급하는 것이 주된 사업이었다. 당시 염료는 국내에서 전혀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입해 팔면 팔수록 이득이 남았다. 광신산업은 또 그림물감 크레파스 등 문구류 수입사업을 했는데, 일제 문구류는 국산보다 훨씬 인기가 좋았다.나는 염료, 문구류 수입 업무를 총괄하는 한편 광신산업과 거래하는 브로커들을 관리하는 일도 맡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브로커' 하면 나쁜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당시 브로커들은 무역회사로선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였다. 그들은 수입품을 도·소매상에 공급하면서 주문을 받아왔고, 또 도·소매상을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 요즘 기업으로 치면 당시 무역회사는 수출입 부서, 브로커들은 마케팅 영업·판매 부서였던 셈이다.
기업 규모나 재력 면에서 자체적인 영업·유통망을 가질 수 없는 무역회사로서는 수입 물품을 대신 판매해주고 유통망을 관리해주는 브로커들이 절실히 필요했다.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던 시절, 브로커들 역시 무역 업무에 능통한 무역회사와 꾸준히 거래하며 수입 물품을 공급 받아야 하는 입장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무역회사와 브로커들은 '악어와 악어새' 관계였던 것이다.
브로커들은 또 하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것은 시장 수요의 흐름과 변화에 관한 정보를 무역회사에 제공하는 일이었다. 브로커들은 소비자들이 어떤 물건을 원하는지, 어떤 물건을 수입해 내다팔면 돈을 벌 수 있는지 등 시장 정보를 무역회사에 알려줬던 것이다. 누구라고 밝힐 순 없지만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기업의 창업주 가운데는 당시 업계에서 알아주던 브로커 출신 인사도 있다.
광신산업은 번창했다. 수입 의존도가 높은 경제 체제하에서 수입 위주의 무역업은 남는 장사였다. 그러나 입사후 2년여가 지났을 때쯤 광신산업은 중대한 고비를 맞게 됐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했던 산업시설이 조금씩 복구되면서 비록 수공업 단계지만 생활필수품 등의 자체 생산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미국 등 선진국의 원조와 수입을 통해 경제 부흥을 꾀하던 정부도 그때서야 더 이상 수입에만 의존해선 안된다는 점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1959년 정부는 아직 걸음마 수준에 불과하던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는 물품의 수입을 금지하는 수입제한 조치를 내렸다. 수입제한 품목 가운데는 광신산업이 수입하고 있던 그림물감과 크레파스도 포함됐다. 비록 질적으로는 떨어지지만 국내에서 삼성 그림물감과 지구표 크레파스가 생산·판매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내가 관리하던 브로커 가운데 곽모씨라는 사람이 있었다. 물품 대금 납입 기일을 한번도 어긴 적이 없을 만큼 그는 신용 있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날부턴가 물품 대금 납입 약속을 어기기 시작했다. 수입제한 조치로 가뜩이나 회사 수입이 줄어든 마당에 믿던 브로커마저 말썽을 피우자 화가 났다. 사무실에서 곽씨를 만나 다그치자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문구 판매를 대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장 상황을 꿰뚫고 있던 곽씨는 수입제한 조치 이후 국내에서 그림물감과 크레파스를 만들어 팔고 있던 손모라는 기술자에게 자금을 대는 방법으로 자신만의 사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당연히 자금 수요가 늘어났고 그 바람에 대금 납입 기일을 어겼던 것이다. 나와 이용섭 사장은 종로구 필운동에 있다는 손씨의 공장을 향해 한걸음에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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