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가를 시작하며대통령 선거에서 네거티브 캠페인이 반드시 '좋지 않은 선거운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에 기초하여 서로 정책의 차이를 대조하는 방식의 네거티브 캠페인은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다. 막연한 느낌에서가 아니라 명확한 기준을 갖고 후보를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따라 두 가지 기본 관점과 세가지 핵심 포인트로 주요 후보들의 선거운동 과정을 평가하고자 한다. 후보의 자질이나 정책공약 뿐아니라 이를 전달하는 선거캠페인 양상을 검증하는 것은 국내에서는 최초의 시도라고 본다. 우선 캠페인은 유권자들에게 올바른 판단 근거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캠페인 방식은 공정성, 정직성, 책임성이라는 최소한의 윤리적 가치에 부합해야 한다. 이는 다시 3가지 평가 기준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첫째, 포지티브 중심의 선거운동이어야 한다. 네거티브 캠페인에 유익한 기능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자신의 비전을 제시하는 포지티브 캠페인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후보들은 달콤한 구호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구체적 정책 대안을 제시하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지지를 받는 대안은 누가 대통령이 되건 정책에 반영되기도 하는 데, 이 점은 선거가 지닌 중요한 긍정적 기능이다. 1992년 미국 대선의 제3후보 로스 페로의 균형예산안은 대통령이 된 빌 클린턴에 의해 수용돼 이후 클린턴 정권의 핵심 업적이 되었다.
둘째, 네거티브 캠페인일지라도 생산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타 후보와의 정책적 차이를 대조하거나 사실에 기초해 타 후보의 자질을 평가하는 것은 판단의 정보를 제공하기에 유익하다. 반대로 인신공격, 사실에 기초하지 않거나 침소봉대하는 흑색선전, 지역감정, 색깔론 등은 비윤리적이다. 캐서린 제미어슨 미 펜실베이니아대 교수 등 미디어 학자에 따르면 흔히 알려진 것과는 반대로 96년 재집권한 클린턴은 상대 후보인 밥 돌보다 훨씬 더 많이 네거티브 캠페인을 했다(69% 대 29%). 하지만 유권자들은 돌이 더 많이 네거티브 운동을 한다는 인상을 가졌다. 클린턴이 정책 중심의 네거티브 캠페인을 행한 반면 돌은 클린턴의 마약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등 인신공격 캠페인을 벌인 결과다.
세 번째 기준은 '이미지선거 넘어서기'이다. 즉 누가 이미지의 기술적 조작에만 몰두하지 않고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선거운동을 수행하는가를 평가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과거 미디어선거 초기와 달리 점차 이미지와 이슈를 적절히 결합하는 추세가 나타났다. 그 결과 과거보다 창조적인 정책들이 대거 제시됐다. 현재 미국에서는 '지구적 윤리 구축을 위한 연구소' 등의 주도로 윤리적 선거를 위한 헌장 만들기 작업이 한창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후 이런 헌장을 만들고 각종 선거의 후보자들이 지키도록 강제해 나가는 것이 요구된다.
16대 대선의 유세 현장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하고 역대 선거와 비교할 때 열기도 높지 않다. 청중 역시 많지 않다. 세를 과시하기 위한 청중 동원이 없고 공해를 유발할 홍보인쇄물이 없다는 것은 그 자체로 돈 안드는 선거를 가능하게 하는 만큼 바람직한 것이다.
하지만 선거 열기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주요후보의 유세전략이 유권자들의 의식을 날카롭게 일깨우기보다 '무디게' 하는 데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가능하다. 상대후보 비난을 주변 찬조연설자가 전담하고 대선후보는 후방으로 물러서는 전략, 상대후보의 장점을 무력화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 정당 강령과 동떨어진 공약을 내놓는 전략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번 선거유세에서는 자기를 알리기보다 숨기려는 '가면 전략'이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가면 뒤의 비방연설
우선 유세를 통해 공통적으로 드러난 양당의 선거운동 전략은 대선후보와 찬조 연설자 간에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찬조연설자는 악역을 자임한 듯 마음껏 네거티브 연설로 일관했다. 이에 반해 후보는 '상대 후보에 대한 비방을 하지 않겠다', '정책으로 승부하겠다' 라고 약속이라도 한 듯 운을 뗀 뒤 정책공약을 중심으로 단문형 연설을 했다.
12월4일 이회창(李會昌) 후보의 일산, 노무현(盧武鉉) 후보의 명동 거리유세 현장. 샐러리맨의 점심시간을 이용한 민주당의 명동 유세에서 찬조연설자들은 이 후보의 병역문제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지난 대선보다 확실히 약효가 떨어진 듯 했지만 혹시 잊지나 않았을까 걱정이라도 하듯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반면 자신의 소속 정당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부정하며 '과거의 기억'을 지우려 애썼다. 차기 정권은 '민주당 정권이 아니라 노무현 정권'이라는 연사들의 강조와 반복이 이를 잘 말해준다.
한나라당의 일산 유세 역시 네거티브 전략이 우위를 점했다. 연설자들은 노무현 후보가 불안하며 무책임하다는 인상을 유권자들에게 심어 주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과거에는 김대중 정권의 부채까지도 승계하겠다고 했다가, 지금은 현 정부와 민주당이 인기가 없어 이를 부정하고 있다고 공격했다. "신문광고의 노 후보는 어느 당 후보인지 조차 알 수 없다"는 비판이 주 메뉴였다. 전형적 네거티브 전략인 색깔론도 등장했다. 그러나 스스로의 정책은 어떤 것인지 부각시키지 못해 노 후보가 이 후보보다 어떤 면에서 급진적이고 과격한지도 인상지우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수렴하는 정책, 모순된 메시지
선거 초반 아주 제한된 평가라는 전제 하에서, 이번 선거유세를 통해서는 핵심 쟁점이 제대로 제시되지 않았다. 과거 군정종식이나 IMF 위기와 같은 핵심 이슈, 그리고 3김이 누렸던 유권자―후보자간 충성도가 없다 보니 유권자의 주목을 끌만한 정치적 소재를 쥐어짜내기 식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이벤트식 캠페인에 주력한 나머지 양 후보의 정책상의 차이는 모호해지고, 검증되지 않은 사실에 기초해서 후보자에 대한 폭로와 비방전이 주종을 이루는 네거티브 선거운동만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양 후보의 선거캠페인과 정책적 지향은 차별화하기 보다 수렴하고 있다. 이는 두 후보가 모든 계층과 지역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이른바 '캐치 올'(catch―all)전략을 추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략의 역기능으로 이회창 후보 진영에서 제시하는 정책공약은 '빈부격차를 확실히 해소하겠다'는 민중주의적 호소에 더해, 후보 자신이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겠다'는 식의 진보적 공약을 내세우면서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햇볕정책을 비판하는 등 그 편차가 크게 나타나고 있다.
노무현 후보 역시 대미관계나 대북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층과 젊은 층의 지지를 고스란히 확보하겠다는 자세를 보이면서도 이 문제들를 적극 이슈화하지는 않고 있다. 더욱이 대부분의 유세에서 정몽준(鄭夢準) 국민통합21 대표와의 공조를 강조하면서도 양측 정책조율의 핵심이 되는 대북정책, 대기업정책 등의 이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취약층으로의 외연확대를 노려 의도적으로 모순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모두 유권자들을 상당히 혼란스럽게 하는 대목이다.
▶의도는 정책이슈 무력화
상대후보의 강점이 될 만한 이슈와 공약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먼저, 더 적극적으로 제기해 무력화하는 선거전략은 1996년 미 대선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이 구사해 성공을 거두었다. 클린턴측은 94년 중간선거에서 미 공화당이 '미국과의 계약'을 통해 내세웠던 공약을 적극 수용해 발표함으로써 재선에 성공했다. 딕 모리스가 고안, '삼각화(Triangular)전략'으로 불리는 이슈를 모호하게 하고 선거 후 정책 혼선을 가져오는 부작용이 있다.
이회창·노무현 후보 역시 불리할 것으로 예상되는 구체적인 정책쟁점들을 희석시키고, 선거를 각각 '안정 대 불안' '새로움 대 낡음'이라는 정서적인 대결구도로 끌고가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양 후보의 선거전략에도 미묘한 차이는 있다. 스포츠용품 마케팅에 비유하자면 노 후보는 특별히 20∼30대의 지지를 호소하는 세대전략을 배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브랜드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이 후보는 거의 일관되게 모든 세대, 계층에게 호소하는 백화점 전략을 펼치고 있다. 또 노 후보측이 점과 점을 연결하여 선을 만들고 이를 통해 면을 만들려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이 후보 진영은 우세지역에 두터운 방풍벽을 쌓아 거점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바람을 차단하겠다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는 인상이다. 다행히 양당이 남은 선거전에서 포지티브 전략을 수립하기로 결정했다는 점, 여중생 사망사건과 SOFA 개정문제에 대해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며 시민사회와 소통하려 한다는 점은 향후 새로운 선거문화를 정착시키는데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공동집필
안병진(安秉鎭)·이준한(李埈漢)·최형익(崔亨翼) (이상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원·가나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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