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지음 청어람 미디어 발행 각 권 2만3,000원산과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고 붙여진 이름 흑산도(黑山島), 목포에서 뱃길로 약 93㎞를 가야 도착하는 우리나라 서남쪽 끝이다. 옛날 돛단배로 일주일은 족히 걸리는 머나먼 섬이었기에 귀양지로도 자주 쓰였다. 정약용의 둘째 형인 손암 정약전(巽庵 丁若銓·1758∼1816)도 이 곳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흑산도를 중심으로 인근의 홍도 대둔도 영산도 다물도 등은 척박한 땅이지만 부근 바다는 멸치 갈치 조기 홍어 낙지 등 수산물의 보고다. 지금도 흑산도 홍어회는 일품이다. 정약전이 살았던 조선시대에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801년 천주교 신유박해 때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의 마음은 흑산도의 색깔처럼 암담했을 것이다. 그는 끝끝내 육지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일생을 마감했지만, 실사구시를 내세운 실학자 집안 출신답게 흑산도에서 16년 동안 부근 수산동식물 200여 종을 조사하고 채집해 '현산어보(玆山魚譜)' 라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어류학서를 남겼다.
2000년 여름, 세화고 생물교사인 이태원(31)씨는 흑산도 땅을 밟았다. 정기선으로 하루 만에 도착했지만, 이미 5년전부터 '현산어보'와 정약전과 그의 시대에 관련된 수많은 문헌들을 수집하고 연구한 후에 마지막 과정으로 현지답사를 시작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저자가 찾아낸 정약전의 잃어버린 저서 '송정사의(松政私議)'는 9월에 학계의 화제가 됐다. '현산어보를 찾아서'는 정약전의 '현산어보'를 현대에 맞게 고증하고 정약전의 발자취를 따라가보는 책이다. 이번에 1차분 3권이 나왔고, 2003년 2월에 두 권이 더 나와 총 5권으로 완간된다.
이 책에서 저자는 '현산어보'의 내용을 해설하되 2년여 동안 흑산도를 답사하며 체험한 현지풍속과 방언, 각종 이야기와 생각 등을 수필처럼 함께 풀어놓았다. 슈베르트의 가곡 '숭어'는 바다에서 나는 숭어가 아닌 민물고기인 송어로 불러야 옳다고 하는가 하면 따개비를 다룰 때는 PC 통신 채팅에서 신안군 섬사람과 나눈 따개비 해장국 이야기를 소개하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지나쳤던 이름에 관한 부분도 소개된다. 말미잘은 왜 이름이 말미잘일까? 저자가 찾은 흑산도 사리 마을에서도 말미잘은 말미잘이다. 필사본으로만 남아있는 '현산어보'의 기록은 한자로 홍말주알(紅末周軋). 그러나 저자는 원문의 말(末)자가 실은 미(未)자이며 몇 번의 필사를 거치는 과정에서 잘못 표기된 것으로 추정한다. '현산어보'의 생물 이름들이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했음을 고려하면 당시 사람들은 빨간 미주알로 불렀을 것이다. 이것을 빨리 부르면 말미잘에 가깝게 된다. 말미잘을 정약전은 "이질을 앓은 사람이 탈항한 것 같다"고 비유했다 한다.
저자는 이런 정약전의 모습에 매료돼 탐정처럼 그의 삶을 파고든다. 정약전은 1811년에 대혜성을 관찰한 기록을 남겼고 생물을 미의 가치에 따라 서열화한 주자를 비판하며 신분차별을 비판하는가 하면 동생 다산의 음악이론서인 '악서고전'을 쓰는데도 크게 도움을 주었다. 저자는 뛰어난 과학자들이 등장할 수 있었음에도 발전하지 못한 한국의 과거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학문적으로 연구가치가 있는 기록들을 추적하기도 한다.
원문에 상어도 잡아먹는 대면이라는 물고기를 추적하는 과정은 한편의 추리소설이다. 처음에는 민어라고 생각했다가 얌전한 성품을 감안해서 새로 찾아낸 것이 돗돔. 이 물고기는 그물을 찢을 정도로 난폭해서 어부들이 "할배 떴다"고 말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400여컷의 세밀화와 800여컷의 자료사진이 들어있어 볼거리도 풍부하다.
저자가 이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혼자의 힘이 아니었다. 흑산도 사리 마을에서 시작되는 여정에서 현지 사정에 통달한 마을 주민 박도순, 장복연씨 등 부터 해변가의 이름 모를 소녀까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정약전 역시 '현산어보'를 쓰며 흑산도의 물고기를 찾는 데는 장창대라는 현지 사람의 도움을 받았고 다산의 제자 이청의 주석으로 책은 더욱 빛날 수 있었다.
저자는 '현산어보를 찾아서'를 쓰면서 장창대도 추적한다. 신안군의 인동 장씨들에게 족보를 수소문하고 후손을 찾아다닌다. 그 결과 흑산도 주변에서는 드문, '참나무 다섯 그루가 심어진' 무덤은 발견했으나 비석조차 없어서 사실 여부는 확인할 길 없었다. 후손들은 장창대가 "천재였으나 나중에는 편지도 못 쓸 정도로 바보가 되었다"는 말만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이 과정은 5권에 수록될 예정이다. "정문기 선생이 번역한 '자산어보'를 수정·보완하려고 시작한 작업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는 저자는 서울대 생물교육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홍석우기자 musehong@hk.co.kr
■현산어보=자산어보 "玆" 옛날엔 흔히 "현"으로 읽혀
'현산어보' 라는 이름이 낯선 사람이라면 '자산어보' 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둘은 동일한 서적이다. 검을 자(玆)는 옛 자전에서 현으로 더 많이 읽히기 때문에 한문학자 임형택(59·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 등은 '자산어보' 를 '현산어보' 라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임교수는 "'사원(辭源)'이라는 한자어원풀이사전을 보면 검을 현(玄)자를 두 개 붙여쓰는 玆 글자는 현으로 읽어야 한다고 되어있다"고 말했다.
정약전은 '현산어보' 서문에서 "흑산이라는 이름은 어둡고 처량하여 매우 두려운 느낌을 주었으므로 집안 사람들은 편지를 쓸 때 항상 黑山을 玆山이라 쓰곤 했다. 玆은 黑과 같은 뜻이다"라고 유래를 밝혔다. 저자는 인터뷰에서 "정약전이나 정약용이 무슨 발음으로 읽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송정사의'를 필사한 유암은 정약용과 그의 제자 이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사람으로, 그의 저서에서 흑산도를 현주(玄州)라고 표기했다. 정약용이 玆 글자를 현으로 읽는 것을 듣고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고 이야기했다.
/홍석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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