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주목 받는 철학자를 들라면 단연 프랑스 철학사가 질 들뢰즈(1925∼1995)가 꼽힌다. 신(神) 이데아 혹은 보편 등 이름은 달라도 끊임없이 '하나'(the One)의 원리를 추구해온 서양철학의 전통에 맞서 개별 사물들의 차이와 사물들간의 접속을 통한 생성에 주목한 그의 철학은 '탈근대'라는 시대적 화두와 잘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열풍이라고까지 할 만한 들뢰즈에 대한 관심은 아무래도 '저항의 시대'를 함께 앓았던 지식인들의 고민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들뢰즈가 정신분석학자 펠릭스 가타리(1930∼1992)와 함께 일궈낸 '68혁명'의 철학적 승화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지향점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80년대를 새롭게 해석하고 이어갈 대안 철학으로 다가온 것이다.'들뢰즈의 친구'를 자처하는 이진경(39)씨 역시 예외가 아니다. "80년대를 마르크스와 더불어 살았다"는 그는 "'과연 마르크스주의가 결여한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를 만났다"고 말한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80년대 말 '이것이 진짜 경제학이다'를 줄였다는 도발적 필명으로 발간한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으로 진보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90년대 이후 '맑스주의와 근대성' '철학과 굴뚝청소부' '철학의 외부' 등을 잇따라 내며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모색해왔다.
이씨가 '현대 철학에 새 이정표를 세운 걸작'으로 꼽히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공저 '천(千)의 고원'(1980)을 쉽게 풀어 쓴 '노마디즘'(전2권·휴머니스트 발행)을 내놓았다. '천의 고원'은 지난해 번역본이 출간됐지만 철학자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난해한 문체와 문학 민속학 동물학 경제학 음악 미술사 등 다양한 학문의 성과를 녹여넣는 서술 방식 탓에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던 들뢰즈 마니아들에게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다.
베개 삼아도 좋을 만큼 두툼한 책 두 권(총 1,500여쪽)을 들고 이씨가 몸담고 있는, 서울 대학로에 자리한 연구공동체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를 찾았다. 이씨는 이곳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4년 넘게 열어온 '천의 고원' 강좌를 토대로 이 책을 썼다. 연구실 대표인 고미숙씨는 "폭발적인 인기를 모은 그 강좌가 수유연구실 성장의 밑거름이 됐을 뿐 아니라, '천의 고원'을 번역하고 엄청난 분량의 녹음 테이프를 풀어 초록을 만드는 데 연구원들 모두가 힘을 보탰다는 점에서 '노마디즘'은 우리 연구실의 역사라 할만하다"고 귀뜀한다.
책 제목 노마디즘(nomadism)의 뜻부터 물었다. "우리 말로 풀자면 유목(遊牧)주의, 즉 유목민적인 삶과 사유이지요. 그러나 들뢰즈, 가타리가 주목한 유목적 삶은 그저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불모지에 달라붙어 새로운 생성(生成)의 땅으로 바꿔가는 것입니다. 즉 노마디즘은 제자리에 앉아서도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붙박히지 않고 끊임없이 탈주선(脫走線)을 그리며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사유의 여행을 뜻합니다." '천의 고원'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이자 그들의 철학의 정수를 제목에 담아낸 것이다.
'천의 고원'은 '리좀(Rhizome)'이란 독특한 개념을 토대로 구성돼있다. 리좀은 하나의 뿌리로 귀착되는 나뭇가지 구조와 달리 이런저런 줄기들이 중심 없이 분기되고 접속되는 형상을 말한다. 이 책은 결론에서 통합된 명제를 제시하는 여느 철학책과 달리 각기 독립적으로 읽힐 수 있는 15개의 장, 즉 '고원'으로 이뤄져있다. 사물의 의미를 이웃한 사물과의 관계에서 찾는 '배치', 어떤 현상을 이질성을 제거하지 않은 채 하나로 묶어 모든 방향으로 열려있게 하는 '일관성의 구도' 등 핵심 개념을 설명하는 각각의 장에도 '산'과 달리 정상이 없는 '고원'의 형상을 부여한 데서 하나의 원리를 거부하는 저자들의 사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따라서 관심 가는 고원부터 읽어가면 되는 장점이 있지만, 고원들간 연계성을 찾아 나름의 그림을 그리는 것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어서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이다.
'노마디즘' 역시 '리좀' 구조를 취한다. 그러나 이 책은 존대어를 써 강의하듯 글을 풀어나가고 저자들이 툭 던져놓은 예증에 친절한 해설을 달아주는가 하면, 저자들이 섭렵한 다양한 학문 분야를 따로 공부하면서 스스로 찾아낸 보다 쉬운 예증을 곁들여 훌륭한 길라잡이 역할을 한다. '천의 고원'에 나오는 개념들 중 특히 난해한 것이 '전쟁기계'다. 이씨는 이를 '국가로 상징되는 고착된 가치에 맞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도구'로 정의하고, "홍길동의 활빈당, 임꺽정의 청석골, 수호지의 양산박처럼 진짜 무기를 들고 싸우는 조직은 물론, 새로운 가치를 창안하는 문학·예술 작품도 아우른다"고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이씨는 "무언가 다른 삶과 사유를 시도하는 모든 이를 위해 이 책을 썼다"면서 "들뢰즈, 가타리가 바랐듯이 이 책 역시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삶과 사유를 변화시키는 데 적절히 이용할 수 있는 책―기계(도구)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한다.
이씨는 서문에서 "이 책은 들뢰즈, 가타리와의 우정의 기록"이라고 적었다. 단순한 해설서를 넘어 그들을 통해 스스로 사유하고 발견하고 만들어낸 철학적 성과도 담겨있다는 뜻이다.
나나 우리를 고집하지 않은 '무아(無我)'란 개념을 고리로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과 자신이 주창해온 새로운 삶의 방식인 이른바 '코뮨주의'의 접속을 시도한 마지막 15장이 그것이다. 이씨는 이 대목을 "내가 '천의 고원'에서 나가는 출구"라고 조심스레 말한다. "서양중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교철학, 인도철학, 아메리카 인디언의 철학까지로 사유 여행의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는 그의 다음 저작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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