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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666)鄭律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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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666)鄭律成

입력
2002.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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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12월7일 작곡가 정율성이 베이징(北京) 근교에서 작고했다. 향년 58세. 뒷날 국가 부주석이 된 국무원 부총리 왕전(王震), 당 주석이 된 중앙위원 후야오방(胡耀邦) 등 중국 공산당과 정부 요인들이 잇따라 그의 빈소를 찾았다. 후야오방은 조사(弔詞)에서 "옌안(延安) 시기에 동지의 노래는 큰 봉우리를 이루어 중국 인민의 해방 사업과 혁명 투쟁에 크나큰 기여를 했다"고 정율성의 업적을 기렸고, 왕전은 "정 동지에 대한 가장 훌륭한 기념은 인민들이 그의 작품을 더욱 많이, 더욱 잘 부르는 것"이라고 말했다.조선인으로 태어나 중국인으로 죽은 정율성은 한국인에게 그리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다. 그러나 그 이름은 중국에서 조선족만 아니라 주류 사회로부터 널리 추앙받고 있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아 경기대회 개막식은 '인민해방군가'로 시작됐다. "전진 전진 전진/ 태양을 향한 대오/ 중국의 대지 위에 섰다"로 힘차게 시작하는 이 노래의 작곡자가 바로 정율성이다. 1939년 옌안에서 '팔로군 행진곡'이라는 제목으로 태어난 이 노래는 '날개를 단 호랑이처럼' 후방에서 전선으로, 해방구에서 국민당 통치 구역으로 중국 대륙 전체에 퍼졌고,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인민해방군가'로 채택됐다.

광주(光州)에서 태어난 정율성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형들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혁명 간부학교를 졸업한 뒤, 항일 운동과 성악 공부를 병행했다. 이탈리아 유학을 꿈꾸던 그는 경제적 곤란으로 그 꿈을 접고, 옌안의 루쉰(魯迅)예술학원에서 작곡을 전공한 뒤, 중국 공산당에 들어가 수많은 혁명 가요를 만들었다. 정율성은 해방 이후 다섯 해 남짓 북한에 머물며 '조선 인민군 행진곡'을 비롯한 군가들을 만들기도 했다.

고 종 석/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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