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중생의 안타까운 죽음은 하나의 불씨가 되어 허위와 가식을 태우고 불평등한 한미관계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폭로하였다. 그 동안 일부 급진세력의 전유물로 여겨져왔던 반미감정은 정치에 무관심했던 계층까지 공감대를 넓혀 가고 있다. 월드컵 대회를 거치면서 자발적 공동체문화를 통해 자부심을 만끽한 우리 국민들은 이번에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은 미군의 참전과 주둔이 미국의 세계전략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더 이상 미국에 대해 위축된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한국전쟁 당시의 노근리 학살에 분노하며 재판권마저 행사하지 못하는 현실을 거부한다. 한국인의 생명은 아랑곳하지 않는 미국의 전쟁위협에도 분개한다.
그들은 무죄판결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경찰과 그 뒤에서 웃고 있는 미군을 보면서 한미관계의 현주소를 보게 되었다. 그들은 단순한 반미감정에서가 아니라 빼앗긴 자존심의 회복과 대등한 한미관계를 염원한다. 그것은 평화와 인권을 존중하자는 운동이지 폭력과 미움을 위한 운동이 아니다.
반면에 미국측은 여전히 북한의 남침으로 망해가던 나라를 자신들이 피를 흘려가며 구원해 주었고 지금도 안보를 위하여 주둔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국의 경제성장이 가능했다고 본다. 그들은 한국인들이 은인인 미국에 대해 마땅히 고마움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배은망덕한 사람들을 막아낼 책임이 한국정부에게 있다고 믿고 있다.
우리 정부는 이런 미국측의 견해에 동조하고 순종하면서 안보를 위해서 필수적인 주한미군의 비위를 거슬리는 어떠한 행동도 자제해 왔다. 그 점에서는 군부독재 시절이나 민간정부나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자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기 보다 미국의 눈치를 살피거나 오히려 정당화시켜 주려는 태도를 보였다. 일부 언론들도 이에 동조하여 처음부터 보도에 미온적이거나 아예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항의시위가 반미주의이고 그것은 미군철수로 이어져 안보를 위협한다는 논리로 일관하였다. 사과라고 할 수도 없는 부시 대통령의 말에 잘했다거나 이제 사과했으니 항의는 그만두자는 미 국무부 대변인이나 할 소리를 하고 있다. 그들도 정부를 비판하기는 하지만 반미시위를 방치하고 있으며 한미간의 재판제도 차이를 국민들에게 '성의 있게'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비난이었다. 결국 미국의 책임은 덮어둔 채 우리 내부의 갈등만 부추기는 셈이다. 그러나 반미감정을 무마하기 위해서 설득해야 할 대상은 우리 국민이 아니라 미국인 것이다.
상당한 거리가 있는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임진왜란 시기의 조선과 명의 관계가 떠올랐다. 당시 명군의 참전은 조선이 일본에 넘어가면 자신의 안보가 위협받게 될 것을 두려워 한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논리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선에 들어와 '속국이 위기에 처한 것을 가엽게 여긴' 명 황제의 특별한 은혜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한편 조선의 지배층들은 명에 대해 '혈맹'으로서 '망해가던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은혜'를 강조하였다. 결국 명군을 불러온 외교력이 왕조를 지켰다는 것을 강조하여 전쟁패배의 책임을 모면하려는 것이었다. 반면에 당시의 백성들은 '명군 때문에 나라를 회복할 수 있었지만, 명군 때문에 산하가 황폐해졌다'고 생각하거나 '왜병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라고 하여 불평등한 조명관계를 비판하였다.
반미감정의 대중적 확산으로 뒤늦게 미국과 한국 정부가 대책을 내놓고 있다. 그동안 수평적 한미관계를 주장하는 것마저 급진적 주장으로 매도해 온 정치권과 언론들이 SOFA 개정까지 내세울 만큼 상황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아직 본질적인 접근에 도달하기에는 갈 길이 너무나 멀며 그나마 진실성이 결여돼 있다. 그것은 결국 한국내의 반미감정을 스스로 조장하는 일이 될 것이 분명하다.
주 진 오 상명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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