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소장 하용출·河龍黜)와 미국 워싱턴대학 인터넷연구소가 공동 주최하고 한국일보사, 정보통신부, 서울대가 후원한 국제학술회의 '인터넷 혁명과 아시아'가 4∼5일 서울대 호암관 목련홀에서 열렸다. 이번 회의는 세계화와 함께 진행되고 있는 정보혁명(Information Revolution)의 거대한 조류 속에서 아시아의 재도약을 위해 역내 국가간 정보화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국제질서의 갈등을 극복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이틀간 회의에 참석한 국내외 저명 학자들은 정보 혁명에 따른 패러다임의 변화, 아시아의 국제 경쟁력, 인터넷과 국제 관계의 변화, 인터넷 혁명의 미래 등의 네가지 주제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했다.■패러다임의 변화
서울대학교 하용출 교수는 인터넷 기술의 확산으로 한국에 불어닥친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지적했다. 하 교수는 전통적으로 인간관계와 감정적 유대를 중시하는 한국적 정서가 인터넷의 동시성과 다양성이라는 특성을 어떻게 소화했는지에 주목했다. 대표적인 예가 한국의 'PC방' 문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인터넷의 특성으로 사람들이 단말기가 있는 곳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는 외국과 달리, 인터넷을 함께 즐기기 위해 한 장소로 모여드는 특이한 문화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인터넷이라는 가상적인 공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인터넷 커뮤니티가 활성화되어 있는 것이 한국의 특성이라고 하교수는 지적했다.
하교수는 사회적 지위나 성의 차별 없이도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밝힐 수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특성에 힘입어 한국에서도 서구와 같은 '시민사회'와 '공적토론'이 활성화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최근 나타난 네티즌들의 반미운동에서 보여지듯 그간 정치적 소신을 밝히기 꺼려했던 한국인들 사이에 여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 토론자들은 언론과 정부에 의해 소외됐던 한국의 정치와 사회운동이 힘을 받으면서 주목할만한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인터넷이 가진 '사회적 연대'의 힘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아시아의 국제 경쟁력
미 워싱턴대의 레슬리 헬름 교수는 인터넷 혁명과 아시아의 국제경쟁력에 대한 주제발표를 통해 인터넷 혁명의 시기로 일컬어지는 1990년대에 일본이 추진했던 정보화 정책의 실패와 교훈을 언급했다. 그는 세계 최고 수준의 생산력과 효율성을 바탕으로 아시아의 경제적 맹주로 군림해온 일본이 인터넷 분야에서는 왜 한국에 뒤처지게 되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90년대 초반까지 일본에 비해 낙후되어 있던 한국의 통신 인프라가 최신 인터넷 기술의 적극적인 도입과 집중적인 투자를 통해 성공할 수 있었음을 지적했다.
레슬리 교수는 특히 일본이 한국의 인터넷에 대한 정책적, 사회적, 경제적 열기를 평가절하하면서 ISDN 등 뒤처진 기술에 의존했던 정책적 착오를 비판했다. 그 결과 2000년 말 한국과 대만 국민의 37%가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에 반해 일본인의 23%만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었다고 레슬리교수는 지적했다.
그는 결론으로 "일본이 월등한 산업 인프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대만, 중국 등에 아시아 IT산업 맹주의 자리를 물려주고 있다"며 "정책적 혜안과 미래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일본적 시스템의 실패"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IT 산업을 통한 국가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하고 있는 아시아 각국들은 "한국의 모델을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인터넷에 의한 국제관계의 변화
'인터넷 시대의 국제관계: 정치 군사적 측면'이라는 주제의 논문을 발표한 세종 연구소의 이상현 교수는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극복하고 전세계를 동시동소(同時同所)로 묶은 인터넷의 힘을 평가하며 "인터넷이야 말로 세계화의 첨병"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인터넷을 통한 전세계적인 정보의 공유와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통해 "높아진 정치적, 경제적 자유만큼이나 안보적인 위협 요소도 증가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농업혁명, 산업혁명, 그리고 IT혁명의 산업적 변화의 단계마다 초래된 국가와 개인의 안보 환경의 변화에 대해 논하면서 "인구와 산업 생산력, 기술 수준에 의해 좌우되는 군사적 능력이 한 나라의 안보역량과 동일시 되던 시대는 끝났다"고 진단했다. 그는 IT기술과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영역의 발전으로 제기되는 '정보전쟁'의 개념이 현실화하고 있다면서 "우리의 삶이 인터넷과 IT 기술에 의존하는 정도가 커짐에 따라 안보적 위험성도 높아지고 있다"고 밝혔다. 즉 최근 속출하고 있는 해킹과 컴퓨터 바이러스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피해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개인과 국가의 다양한 활동들이 IT 인프라에 집중되면서 이에 따른 안보적 취약성도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 정책과 인터넷 혁명의 미래
대만 타이페이대의 팀 첸 교수는 기업들의 치열한 시장 경쟁없이 국가 주도로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가 구축된 대만의 사례를 들면서 특별한 사회적· 경제적 상황에 따른 국가의 정책적 입장이 IT 선진국이 되기 위한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했다. 2000년 이후 전국 가정의 99%에서 초고속 인터넷 사용이 가능해진 대만의 경우 '청화 텔레콤'이 독점적으로 ADSL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팀 첸 교수는 밝혔다. KT, 하나로통신, 두루넷 등 다수의 기업들이 케이블 인터넷, 위성 인터넷, ADSL 등 다양한 종류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우리나라와는 판이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는 통신 사업자들 마다 인터넷, 무선 통신, 유선 전화, 국제전화 등 다양한 통신서비스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경쟁을 부추긴 우리나라와 달리 초기에 시장을 선점한 청화 텔레콤의 불공정한 영업행위에 대해 방임적인 태도를 취한 대만 정부의 통신 정책에 기인 한다고 첸 교수는 밝혔다.
첸 교수는 시장경쟁 원리에 역행한 이러한 정책이 오히려 대만 초고속 인터넷 산업을 활성화 시켰다고 지적했다. 한국과 달리 고작 수백만 가구 밖에 안되는 협소한 시장을 대상으로 여러 업체가 동시에 사업을 벌였다면 출혈경쟁을 피할 수 없고, 결국 수익률 악화로 이어져 대만이 오늘처럼 저렴한 가격에 고품질의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었을 것이란 주장이다.
/정리=정철환 기자 plomat@hk.co.kr
■ 헬만 워싱턴大 교수
"IT혁명을 일으킨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는 결국 세계 경제의 중심을 차지할 것입니다." 4일 회의 첫 순서로 아시아의 인터넷 혁명에 대해 발표한 도널드 C. 헬만(Donald C. Hellmann·69·사진) 미 워싱턴대 교수는 아시아의 인터넷 혁명이 전후 아시아의 경제적 도약에 이은 또다른 '기적'의 시작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IT혁명이 국내외 정치 사회에 미친 영향은.
"우선 IT는 사회 구성원간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바꿨다. 과거에는 정보의 접근이 특정인들에게 제한돼 있었으나 지금은 누구나 큰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도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 영향으로 정치적 행동양식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사회·정치적 이슈에 대해 쉽게 접근하고 인터넷을 통해 커뮤니케이션하면서 쉽게 조직된다.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압사 사건에 대한 한국인들의 의사 표출도 인터넷을 통해 이뤄졌고 조직화했다. 물론 이러한 정치적 행동이 나쁜 결과를 낳을 때도 있다. 9·11 테러를 일으킨 범인들이 인터넷을 통해 미국 도서관에 접속하면서 정보를 빼낸 것이 한 예다. 또 해킹을 통해 정치적 의사 표현을 하는 핵티비즘(hacktivism)도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좋은 영향이든 나쁜 영향이든 인터넷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인터넷은 사람들의 세계관도 바꿀 수 있다."
― 아시아의 IT혁명이 아시아 경제에 미친 영향은.
"세계 최고의 초고속인터넷 인프라를 바탕으로 급속도로 발전한 한국의 IT혁명은 대만이나 싱가포르 등 주변국의 모범이 되고 있다. 이에 따라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주력 산업이 변화하고 있고, 생산성도 크게 향상되고 있다. 이에 비해 IT 발전이 느린 일본에서는 이러한 경제적 변화가 크게 일어나지 않고 있으므로, 머지않아 한국이 일본 경제를 따라잡을 수도 있다. 이렇게 아시아 각국이 IT를 미래 핵심산업으로 발전시킨다면, 결국 나중에는 아시아가 세계 경제의 중심을 차지할 것이다."
― IT혁명이 국제 관계에 미친 영향은.
"현재 세계 관계는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 원인으로 냉전의 종결과 IT혁명, 미국이 더 이상 세계정치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IT는 이렇게 결정적이지 않고 변화하는 시대를 이끌어가고 있는 핵심 요소 중 하나다. 따라서 앞으로의 세계 관계에서는 IT가 발전하고 있는 아시아가 급부상할 것이다. 또한 여태까지 세계 공용어는 영어였으나, 가장 많은 인터넷 사용자가 아시아인이 되면서 아시아의 언어들도 힘을 얻었고 발언권을 얻었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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