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화산업에서 일할 당시 은행 가운데 수출입 업무를 보는 곳은 한국은행 뿐이었다. 한국은행은 어찌나 꼼꼼이 서류를 검토하는지 영어 단어의 스펠링 하나라도 틀리면 서류를 받아주지 않았다.그날도 나는 다음날 은행에 제출할 서류를 꾸미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근무시간내에 끝낸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결국 야근을 하게 됐는데 영어사전까지 찾아가며 한 자 한 자 타이핑을 하는 바람에 시간은 훌쩍 밤 10시를 넘겨버렸다. 그 때 박 사장이 사무실 문을 꽝 차고 들어왔다.
"송삼석씨 지금 뭐하는 겁니까." 나는 그가 왜 그렇게 험상궂은 얼굴을 하는지 이유를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 "내일 은행에 제출할 서류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때서야 박 사장의 얼굴이 펴졌다. 박 사장은 내가 회사 업무 이외의 일을 하며 뭔가 다른 마음을 먹고 있는 것 아닌가 오해를 한 것이었다. 박 사장은 서류를 덮어버리더니 반강제로 나를 근처 술집으로 끌고갔다. 그는 지금껏 회사를 경영하면서 나처럼 일을 해주는 사람은 처음 봤다며 감격해 했다. 그날 박 사장과 나는 대취하도록 밤새 마셨다.
삼흥사 시절 흥청망청 월급을 쓰는 바람에 실직후 생활고에 시달렸던 쓰라린 경험 탓에 나는 풍화산업에 입사한 뒤부터는 저축을 하기 시작했다. 서대문경찰서 부근에서 하숙을 하던 나는 월급 3만원에서 하숙비 1만원을 제한 나머지 돈 가운데 최소 생활비만 빼고는 전부 저축했다. 그리고 회사 업무에 지장이 없는 범위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르바이트는 박 사장 동의를 얻고 난 뒤에 할 수 있었다. 박 사장은 '야간 사건' 이후 나의 근면성을 인정해주고 있는 터였다.
아르바이트란 다름 아닌 무역 업무 대행이었다. 당시만 해도 수출입이 활성화하지 못한 상태여서 기업체를 운영하면서도 무역 업무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외국에서 물건을 수입해 팔려는 기업체의 요청을 받고 서류를 꾸며준 뒤 수수료를 받았는데, 건당 수수료가 내 월급 수준인 3만원이나 됐다.
평균 한달에 2, 3건씩 무역 업무를 대행해주고 벌어들인 수수료를 나는 고스란히 모았다. 돈도 벌고 다른 기업체 업무까지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하지만 과거 경험 탓에 아르바이트로 벌어 저축한 돈은 절대 손대지 않았다. 내가 결혼한 1959년까지 5년 동안 그렇게 모은 돈이 700만원 가량이었다. 그 돈으로 나는 북아현동에 낡긴 했지만 집을 한 채 장만할 수 있었고, 결혼 비용까지 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중 일부가 오늘날 모나미를 있게 한 '종잣돈'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억척같이 돈을 모으면서도 나는 낭만을 즐기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50년대 중후반, 서울에는 나 같은 젊은이들이 맘껏 젊음을 발산할 수 있는 그런 장소는 전무했다. 전쟁이 남긴 상처가 워낙 크고 깊었던 까닭에 젊은이들은 그저 대폿집을 전전하며 감당하기 힘든 현실의 무게를 잠시 잊곤 했다. 나는 회사 업무와 아르바이트 때문에 이래저래 다른 기업체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기회가 잦아 사정이 좀 나은 편이었다. 나는 회사 인근 명동에 있는 스탠드바를 자주 가곤 했다. 그곳에서 무역업체 사람들과 어울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돈벌이가 되는 사업에 대해 주담을 나누곤 했다. 술을 마시다 보면 가진 돈보다 더 마시게 되는 경우가 잦았는데 그럴 때면 으레 외상이었다. 술집을 나서면서 주인에게 한 손을 번쩍 들어 보이며 "어이, 나 가네"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주인은 알아서 외상 장부에 기록했다가 월말에 술값을 받았는데 절대 속이는 법이 없었다.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속임수로 장사를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 시절에는 그런 낭만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낭만은 주인과 손님간에 쌓인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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