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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모나미 인생 송삼석 (15)49계단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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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모나미 인생 송삼석 (15)49계단집 사건

입력
2002.1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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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리맨이라면 누구나 초년병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쯤은 갖고 있는 법. 전에 약간 언급한 것처럼, 나는 직장 생활 덕분에 주머니가 두둑해지자 가끔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물론 그것 때문에 낭패를 보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의 두둑한 배짱이 그리울 때가 가끔 있다.삼흥사에 입사한 지 6개월여가 지난 1952년 10월. 한 대학 동기동창이 결혼을 한다고 연락해왔다. 예식장이 없던 시절, 결혼을 앞둔 선남선녀들은 피난지 부산에서 마땅한 식장을 찾는데 항상 애를 먹었다. 결혼식장으로 자주 애용되던 곳은 교회와 절, 관공서 강당, 호텔 등이었는데 숫자가 절대 부족했다.

때마침 친구 녀석이 결혼할 무렵 미군이 아주 이색적인 예식장을 일반에 공개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LST'라는 상륙정(上陸艇)이었다. 영화를 보면 상륙 작전시 해변에 큰 입을 턱 걸쳐 벌려놓고 병사들을 토해내는 배가 바로 LST다. 신랑 신부와 주례가 서는 단(檀)을 빼고도 수백명의 하객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큰 이 배가 예식장으로 제공되자 대기자가 줄을 섰고, 이 희한한 광경을 보려는 구경꾼들로 식장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마침 친구도 LST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바람에 나는 평생 두고두고 잊지 못할 이 이색적인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문제는 결혼식이 끝난 뒤였다. 같은 부산 하늘을 이고 사는 처지였지만 각자 바쁜 생활 탓에 자주 만나지 못했던 대학 동창들이 2차를 가기로 했다. 마침 LST 정박 항구가 삼흥사와 가까워 내가 2차 장소를 잡게 됐다. 나는 회사 일로 자주 드나들던 요릿집으로 동창들을 안내했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길에서 요릿집 정문까지 계단이 49개나 된다고 해서 '49계단집'이라고 부르던 곳이었는데 음식도 잘하고 분위기도 좋아 꽤나 비싼 곳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친구들끼리 회포를 푸는 자리였던 데다 술값은 친구들이 공평하게 나눠 내기로 했기 때문에 나는 호기있게 음식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시중을 드는 아가씨들도 들어오고 술이 몇순배 돌기 시작하자 20여명이나 되는 친구들은 너나 가릴 것 없이 교가에, 응원가에, 유행가까지 쉴 새 없이 불러댔다. 통금시간이 다 돼 갈 때쯤 되자 모두 대취했다. 주인이 들고 온 계산서에 적힌 술값은 무려 450만환. 내 월급의 4배가 넘는 액수였다. 하지만 돈을 부쳐 주기로 한 친구들 약속을 믿고 나는 자신있게 내 이름으로 외상을 했다.

그러나 믿었던 친구 녀석들은 돈을 부쳐주지 않았다. 연락을 해도 "알았다"면서 차일피일 미루기 일쑤였다. 결국 보기좋게 450만환을 덤터기 쓰게 된 나는 49계단집 주인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평소 자주 드나들던 단골 손님인데다 회사가 팔아주는 양이 만만치 않아 주인은 할부로 갚아도 좋다고 허락했고 나는 매월 30만환씩 갚아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회사가 서울로 이전할 때까지 10개월 동안 나는 꼼짝없이 300만환을 49계단집에 갖다 바쳤고 그 때문에 호사스럽기까지 했던 생활은 궁핍하게 변했다.

서울로 올라갈 때 49계단집 주인에게 "외상값은 틀림없이 부칠테니 걱정말라"고 큰소리쳤지만 더 이상 외상값을 갚을 수 없었다. 49계단집이 예기치 않은 화재로 불에 타 없어지고 주인과 연락도 닿지 않게 된 것이다. 나를 믿어준 주인에게는 미안했지만 결국 300만환으로 450만환 외상값을 치른 셈이 됐다.

술자리에 참석했던 친구들은 이후 지금까지 내가 49계단집에 지불한 술값을 주지않고 있다. 그래서 요즘에도 가끔 그 친구들을 만나면 나는 육두문자도 섞어가며 "외상값 갚으라"고 한다. 그렇게 해도 돈을 갚을 친구들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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