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오후4시 전남 무안군청 3층 회의실. 메모지를 든 부군수가 들어서자 시끌벅적하던 회의실엔 일순 정적이 내려앉았다. "복용마을로 결정됐습니다." 부군수의 발표가 끝나기 무섭게 환호와 탄식이 엇갈려 터져 나왔다.탈락한 무안읍 평용리의 배길동(61)씨가 노기 등등한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내일부터 우리 마을에 똥차(분뇨 운반차)는 절대 못 들어올 것이여." 분을 삭이지 못해 아래층 군수실로 돌진할 태세이던 그는 직원들에게 저지당하자 욕설과 넋두리를 있는 대로 쏟아냈다. 눈엔 눈물까지 그렁그렁했다.
반면 8개 마을을 제치고 유치에 성공한 무안읍 성동리 복용마을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욕 봤소, 돼지 몇 마리 잡아야지라." "이게 꿈이요, 생시요." 주민들의 치하와 여기 저기서 건네는 막걸리 사발에 들뜬 김대기(65) 추진위원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말도 마소, 잠 한숨 못 잤어. 혀가 쫙쫙 갈라지는 것이 사법고시보다 더 어렵드랑게."
■"오죽하면 쓰레기장을 유치하겠소."
양파 농사로 먹고 사는 황토골 순박한 촌로들을 울리고 웃긴 것은 다름아닌 쓰레기소각장(환경관리종합센터). 도회지 사람들은 "죽어도 우리 동네엔 안 된다"며 반대하는 혐오 시설을 무안군에선 무려 9개 마을이 서로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어림 없는 일이었다. 전문기관의 용역을 거쳐 삼향면 맥포리 등이 소각장 부지로 선정됐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고민 끝에 꺼낸 마지막 카드가 찜질방 헬스장 등을 센터주변에 건립하고 20년에 걸쳐 지원금을 지급하는 등 모두 105억에 달하는 인센티브 제공이었다. 10월 이 같은 내용이 반상회 등을 통해 전해지면서 분위기가 급격히 바뀌어 유치 신청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선정 절차도 군정조정위원 협의 결정에서 무안군내 이장단과 새마을부녀회장단 등 주민 대표들이 포함된 평가단 48명의 현장답사 후 선정으로 강화됐다.
"결국 돈 때문"이라는 군 관계자의 말마따나 소각장에 따라오는 인센티브가 사태를 180도 바꿔놓은 것이다. 하지만 진짜로 사태를 돌려놓은 것은 돈 이전에 개발 소외에 갈수록 설자리가 좁아 드는 농촌 현실이었고, 그 뒤에 버티고 선 아직은 순박한 시골 사람들의 마음자리였다. "오죽하면 쓰레기장을 서로 유치하겠다고 나서겠소. 농사 지어선 답이 안 나오는데." 무안읍 평월마을 고영석(57)씨는 "씨 뿌리면 적잔디 누가 하려고 해. 노는 땅이 지천인데 쓰레기장이든 뭐든 그럴싸한 건물이라도 들어서면 께저분한 마을 분위기는 바뀔 거 아니여"라며 속내를 내비쳤다. 성동리의 한 촌로(65)는 "누가 혐오시설인지 모르나. 보성 환경센터도 견학 가보니까 폐수에 쓰레기 냄새가 만만찮더만. 그래도 쌓이는 빚더미보단 낫지 않겠어. 좋은 일도 하고 빚도 조금 갚으면 좋지"라며 입맛을 다셨다. "반대한다고 능사여. 이거라도 들어오면 사람 구경도 하고 목구멍에 숨통이 트이겄는디"라는 윤형찬(60·몽탄면 대치리)씨의 바람처럼 쓰레기 소각장은 황량한 시골마을에 그나마 '희망'이었다.
■부지 선정 직전까지 치열했던 유치전
"우리야 돈이 있어 빽이 있어, 로비는 무슨 로비!" 평가단의 부지 선정을 하루 앞둔 지난달 28일 밤, 삼삼오오 모여든 평월마을 주민들은 "다른 마을은 여기저기 선을 댄다는디…."라며 다른 마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평용리 주민들은 아예 결의대회를 열었다. 1993년 마을에 들어선 분뇨처리장 때문에 "땅값이 똥값이 됐다"는 주민들의 유치결의는 비장했다.
유치전은 다음날 평가단의 현장답사에서 절정을 이뤘다. 평가단 앞에서 메가폰을 잡은 마을 대표들은 제각각 유치당위성에 폭탄 공약까지 내놓으며 열변을 토했다. 무안읍 노동약곡마을 정한수(50) 이장이 밤새 손수 만든 차트를 짚어가며 비좁은 진입도로 해결 방안을 설명하자 평가단 속에서 "군 의원으로 나서도 되겠구만"이라는 우스갯 소리가 나왔다. 청계면 청수리에선 "소각장뿐 아니라 납골당도 유치하겠다"고 선언했고, 몽탄면 대치리에서는 "납골당과 더불어 발전기금을 장애복지시설에 기부하겠다"고 응수했다. 평용리에서는 예상대로 "소각장을 안주면 분뇨 처리장도 뜯어가라"는 반 협박이 나왔다. 주민들은 현장 답사를 마치고 떠나는 평가단에게 일일이 손을 흔들어 배웅하며 연신 고개 조아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공모에서 평가까지 주민의 힘으로
이날 5시간에 걸쳐 9개 마을을 돌고 온 평가단 48명이 군청에 도착한 것은 오후3시. 오랜만에 뾰족구두와 양복을 차려 입은 민간평가단 18명도 평가표 작성에 들어갔다.
"민원 소지에 발전 계획까지 봐야 하니까 어렵구만." 민간 평가단인 해제면 천장리 이장 정병태(54)씨는 현장에서 적어온 메모지를 꺼내놓고 이마에 주름살까지 잡아가며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집계가 끝나고 드디어 발표 시간.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관계 공무원들이 입지 조건이 좋다고 은근히 희망하던 곳도, 언론 홍보까지 해가며 열을 올렸던 곳도, 혐오 시설을 들어 내겠다고 주장한 곳도 아니었다. 민간평가단 대부분의 바람처럼 "민가와 멀리 떨어져 민원 소지가 적고 확장성 높은" 성동리 복용마을이 부지로 최종 결정됐다. 공모에서 선정까지 주민들의 힘으로 이뤄낸 핌피(PIMFY·Please In My Front Yard)의 첫 성공사례는 이렇게 탄생했다.
/무안=글·사진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 핌피(PIMFY)란
'님비(NIMBY·Not In My Back Yard)'는 쓰레기 소각장, 납골당 등 공익시설이지만 혐오스럽기 때문에 "우리 마을에 지을 수 없다"는 사회 현상을 말한다. 화장장 건립이 몇 년째 표류하고 있는 서울시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대부분의 지자체 역시 님비 현상에 밀려 혐오 공익시설 건립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와 반대로 혐오시설 유치를 희망하는 것은 '핌피(PIMFY·Please In My Front Yard)'라고 한다. 각 지자체가 보상금 제공, 혐오시설 공평 분담 등 갖가지 묘수를 짜내 핌피를 유도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실정이다. 실제 지난해 경북 경산시가 100억원의 지원 기금과 쓰레기 반입 수수료 10%(연간 3억원) 제공이라는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걸고 쓰레기 매립장 공모에 나섰지만 신청한 마을은 한 곳도 없었다.
강원 영월군이 지난해 30억원의 마을발전기금을 걸고 폐기물종합처리장 부지를 공모, 9개 마을이 신청서를 낸 선례가 그나마 유일하다. 하지만 영월은 전남 무안군처럼 지역 주민이 참여하는 선정 방식이 아니라 전문기관에 입지 선정을 맡겨 해결했다. 방식은 다르지만 경기 안성시의 경우도 핌피 사례로 꼽힌다. 안성시는 1998년부터 쓰레기 매립장·소각장, 납골당, 화장장, 공원묘지 등을 마을에 골고루 분산 설치, 주민들의 불만을 잠재웠다.
/고찬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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