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경우 유능한 대통령 평가 잣대의 하나로 선거 캠페인 기간에 약속한 공약들을 재임기간에 슬기롭게 폐기처분하는 기술이 정치학자들이나 경제학자들 사이에 종종 회자(膾炙)된다. 최근 대통령 후보들이 제시한 장밋빛 공약들을 접하게 되면 이들이 과연 실현가능할 것인지 의구심이 앞서며, 예나 지금이나 새로 취임할 대통령이 어떻게 중지를 모아 그 우선 순위를 결정하고 다수 공약을 폐기처분할 것인가에 지혜를 모아야 하는 처세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동서를 막론하고드 득표를 위한 장밋빛 공약은 근절되지 않고 있으며 우리네 실정 또한 예외가 아님이 이번 대선에서도 여실히 입증되고 있다.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10대 국가개혁 과제를 비롯한 200여항의 대선공약을,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4대 비전 20대 기본정책 150여항의 핵심과제를,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는 13개 분야 총 100여개에 이르는 공약을 발표하였다.
이 후보는 사회복지예산 GDP(국내총생산)대비 12%, 교육예산 GDP대비 7% 등 주요 공약 소요액이 대략 GDP대비 22%를 상회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노 후보 역시 천문학적인 예산이 요구될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 복지·교육예산의 증액을 발표하는 등 방만한 예산증가를 수반하는 공약들을 제시하고 있다. 권 후보 또한 교육분야 GDP대비 7%로의 확대, 10대 필수의료행위 보험화 확대 및 저소득 생활보장비 300만원으로의 인상 등 엄청난 재원이 요구되는 장밋빛 공약을 제시하고 있다.
세 후보 모두 복지, 교육, 과학기술, 농어촌 등의 재원확대를 경쟁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어느 공약 하나 이를 뒷받침할 재원조달 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현재 우리 정부의 채무는 125조원에 이르고 여기에다 국가가 대신 갚아야하는 보증채무도 106조원에 달하고 있다. 재정건전화가 시급히 요구되는 4대 연금 및 의료보험재정, 남북경협에 따르는 재정수요 등 당면하고 있는 정부재정의 어려움을 감안할 때 향후 지속가능한 재정 증가율이 6%이내 임이 몇몇 연구결과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이러한 재정상황을 감안할 때 다수 공약의 실현가능성에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어디 그 뿐인가. 세계에서 가장 사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기업인들에게는 노동의 유연성을 약속하지만 근로자들 앞에서는 250만개의 일자리 창출을 내세운다. 자유무역협정(FTA)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 농민 표심을 잡기 위해 관세화 유예를 고수하겠다거나, 농촌 지원을 획기적으로 늘리겠다는 공약을 남발하고 있다. 코앞의 표만을 의식해 국민들의 의견수렴 없이 교원의 정년환원을 약속하기도 한다.
이러한 정치인들의 공약 남발을 제도적으로 막기 위해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뷰캐넌 교수는 균형예산 입법화를 권한다. 경기가 침체하거나 선거철이 다가오면 정부지출을 쉽게 늘리지만, 재정이 어렵고 호황국면이 예상되는 시점에서도 정부지출을 삭감하고 세금을 늘리는 정책은 유권자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이유로 정치인들이 멀리하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마찬가지 현상인가 보다.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회수불가능한 공적자금 누적, 소외계층을 위한 복지지출 확대 등으로 우리 정부의 재정상황은 장밋빛 공약을 남발할 정도로 한가롭지 못하다. 오히려 정부지출을 절감하고 세원을 확대하여 세입을 늘려야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을 국민에게 솔직히 알리고 함께 고통을 나누는데 앞장서겠다는 용기있는 지도자를 지금 우리는 필요로 하고 있다. 어느 후보자가 진정 국민에게 땀과 눈물을 요구하는지를 두 눈 부릅뜨고 판별해 보자. 후보자가 나를 위해 어떤 공약을 제시하고 있는가를 식별하기 이전에 투표자 개개인이 어떻게 고통을 분담하는데 동참할 수 있는지를 사려깊게 숙고하는 자세가 우선해야만 훌륭한 지도자를 선별할 수 있음을 우리 모두 되새겨야 할 시점이다.
이 만 우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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