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서가 해코지하려는 게 아닌가 잔뜩 긴장했다. 하루 종일 장관을 만나게 해달라고 떼를 쓴 내가 마음에 들리 없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비서가 이교선 상공부 장관에게 하는 말은 다소 의외였다."장관님. 송삼석 학생이 상대를 졸업했다는데, 이왕이면 기업체에 취직을 부탁해보는 게 어떨까요. 마침 삼흥사라는 무역회사에서 사람을 구한다고 합니다. 삼흥사라면 꽤 알아주는 회산데 어떻겠습니까."
비서 의견을 들은 이 장관은 "자네가 선택하게"라며 내게 공을 넘겼다. 공무원은 신분이 확실한 데다 비록 전쟁중이긴 하지만 정해진 봉급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민간 기업에 더 마음이 끌렸다. 상대를 나왔으니 무역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삼흥사가 무역회사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주저없이 삼흥사를 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내가 걸어온 인생을 결정짓는 분수령이 됐다.
그때 일을 떠올리면 정말 이상한 점 투성이다. 아무리 패기와 혈기가 넘치는 젊은 시절이고, 또 형님의 은사라 해도 무턱대고 장관실에 가서 취직을 시켜달라고 부탁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부터가 그렇다. 또 때마침 장관과 비슷한 시간에 볼 일을 보게 된 일, 장관이 공무원으로 채용하려 하는데 삼흥사라는 기업체가 나타난 일 등등…. 나는 그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내게 기업인의 길을 가도록 운명지우셨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강원 지역에서 캐내는 텅스텐이나 철광석 등 광물을 수출하던 삼흥사는 부산역 근처에 있었다. 나는 무역업무를 보게 됐지만 현실은 강의실에서 배우던 것과는 판이했다. 영문, 일문 타자는 물론 편지 쓰는 법, 전신전보 주고받는 법, 신용장 개설 방법 등 기초적인 업무부터 새로 배우기 시작했다. 삼흥사가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무역회사라고는 하지만 직원은 10명도 채 안됐다. 내가 무역 업무를 하면서 영업이나 총무 업무를 외면할 수 없었고, 다른 직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영도 하숙집에서 매일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 시청이나 상공부, 은행, 우체국 등 무역업무와 관련된 기관들이 회사와 가까운 거리에 있어 업무를 볼 때는 항상 걸어 다녔다. 회사 숙직은 직원들이 번갈아가며 했는데, 총각인 내가 거의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하숙집에 돌아가봐야 기다리는 마누라도 없고 또 숙직비가 2만환이나 돼 나는 다른 직원들의 숙직을 대신 서주면서 꽤 짭짤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그때 내 월급이 105만환이었는데 하숙비 40만환을 제하면 65만환이 남았고 여기에 숙직비 수입까지 더해 나는 어머니 할머니께 용돈을 부쳐드리고도 생활하기가 꽤 괜찮았다. 다음에 이야기 하겠지만 그런 풍족함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돈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었는지 난생 처음 월급을 받게 되면서 나는 가끔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1953년 9월 대대적인 환도(還都)가 시작됐다. 정부 부처는 물론 은행 등 금융기관도 모두 부산에서 서울로 옮겨왔다. 서울은 그야말로 폐허였다. 밤이 되면 을씨년스런 기운이 온 도시를 휘감는 듯했다. 그래도 되찾은 수도를 재건하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시작됐다. 삼흥사도 서울로 돌아와 전쟁 발발전 사무실 자리였던 한국은행 옆 삼흥사 빌딩에 다시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사무실 주변 소공동은 상공부 등 정부 부처와 한국은행, 시중은행들이 자리를 잡고 부산으로 피난갔던 기업체들이 속속 집결하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금융·비즈니스 타운으로 변모해갔다. 그러나 삼흥사에는 조금씩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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