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청(白樂晴·64) 서울대 영문과 교수는 "가회동에서 약속이 있으니 그 전에 종로에서 잠시 만날 수 있겠다"고 했다. 서울 종로구 가회동은 건축가 김석철 명지대 교수의 사무실이 자리한 곳이다. 김석철 교수는 새만금의 아직 완성되지 않은 방조제를 황해안 도시공동체를 만드는데 써야 한다는 제안을 계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발표했다. 백낙청 교수는 새만금 도시공동체안이 분단 체제 극복을 위한 초기 단계로 서울과 지방의 격차를 해소하는데 이바지하길 희망하고 있다. 백낙청 교수가 정년 퇴임한다. 12월6일 오후3시 서울대 인문대 교수회의실에서 '막스·니체·프로이트 이후의 로렌스'라는 제목으로 고별 강연을 갖는다. 그는 D.H.로렌스 연구로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실 백낙청 교수의 퇴임은 그 사실 자체로 큰 의미를 갖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의 이름 앞과 뒤에는 '문학비평가'와 '서울대 교수'가 놓여 있되, 그는 이 규정에 갇혀 있지 않았다. 그는 한국 사회의 야만성과 맞서 싸운 지식인이었으며, 분단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인 방안을 부단하게 실험해온 이론가였다. 정년 퇴임을 일주일 앞두고서도 그는 '새만금 바다도시 만들기' 학술회의 준비로 분주했다. 11월30일 교보빌딩에서 백낙청 교수를 만났다.
―정년 퇴임의 감회는 어떠신지요.
"학생들과 함께 하는 수업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건 아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직장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나 황홀해요."
―1974년 민주화회복국민선언 서명으로 해직되었다가 80년 복직하셨던 때를 제외하곤 서울대 영문과에서만 근무하셨지요.
"그때도 직장이 없었던 건 아니었어요. 계간 '창작과비평'(창비)을 일선에서 경영했으니까요. 오히려 정신이 없었어요. 부도를 막으려고 매일같이 뛰어다녀야 했고, 하루하루 긴장하면서 살아야 하는 정국을 겪었지요."
―많은 사람들에게 선생님은 교수보다는 '창비'의 편집인으로 더욱 깊이 각인돼 있습니다.
"학자로 살아간다는 것, 또 출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이 두 가지 삶을 함께 하는 데 큰 갈등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관리함으로써 조화롭게 살아올 수 있었지요. 사실 잡지 경영자로 나섰을 때가 힘들었어요. 학문과 경영은 잘 맞지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옛 선비들도 병법을 공부했다지요. 현대의 병법은 '돈벌이'가 아닌가 싶어요. 현대의 선비 격인 문인이 현대의 병법인 경영을 공부한다는 심정으로 당시의 어려움을 감수했습니다(웃음)."
―선생님은 36년 간 창비와 함께 살아온 창간 편집인이십니다. 선생님과 '창비'의 이름은 동일시됐는데요.
"창비를 창간했던 당시(1966년 1월) 한국 사회는 보수적 분위기가 팽배했습니다. 문학은 그러한 사회 현실과 유리돼 있었고요. 나는 문학이 역사와 사회를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문학의 장을 넓히고 싶었지요. '창비'는 공동 작품이에요. 비단 '창비 식구'들 뿐만 아니라 뜻을 같이 한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자라온 것입니다. 78년에는 리영희 교수가 창비에 실은 '8억인과의 대화'가 문제돼서 판금되기도 했고 80∼87년에는 급기야 폐간됐었지요. 창비 복간은 국민들이 찾아준 것이라고 생각해요. 보답해야 한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창비는 그와 같은 일들을 겪으면서 성장하고 자리잡았습니다. 지금은 창비에 많은 시간을 들이는 건 아닙니다. 고세현 사장이 경영을 맡고, 최원식 교수가 주간을 맡고 있지요. 나는 '얼굴'이 필요할 때만 나선다고나 할까요.(웃음)"
―창비는 해외 석학들의 글을 국내에 소개한 것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지요.
"창간호에서는 사르트르의 글을 실었고 이어서 마르쿠제가 소개됐지요. 좀더 수준높은 잡지를 만들고 싶었어요. 문학이 다른 분야와 연계해야 하고, 한반도에 머무르지 않는 세계적인 시각을 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해외의 학자들과 접촉해 직접 글을 받기로 했지요. 브루스 커밍스나 이매뉴얼 월러스틴 와다 하루키 등은 세계적인 석학 이전에 친구여서 흔쾌히 창비를 위해 글을 써주었습니다."
―문학평론가로서 실제 비평보다는 이론 비평이나 담론 위주의 비평에 치우친다는 지적도 있지 않았습니까.
"실제비평이 따로 있고 이론 비평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최근 내가 현장에서 멀어져 온 것은 사실입니다. 사회 활동에 많은 시간이 들어간 탓이지요. 소설가 신경숙씨나 시인 김기택씨 등에 대한 평론을 발표한 것도 사실 좀 늦은 편이었지요."
―선생님의 비평은 민족문학론에 기반을 두고 있고 분단 체제 극복의 열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월드컵 이후에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이 커지고 '일류국가론'이 나왔지요. 문제는 이 개념이 분단 체제의 해소 없이 대한민국 단독으로 일류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환상을 조장하기 쉽다는 겁니다. 나는 단일형 통일국가를 분단 체제의 극복을 위한 유일한 해법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남북의 긴장완화, 교류 협력 등은 현 단계에서 필요하고 시행해야 할 방안입니다. 현 정부의 방침과도 맞물리는 것이지요. 다음 단계에는 그때의 상황에 맞는 방안을, 궁극적으로 최종 단계의 국가 형태도 미리 그리지 말고 열어놓자는 겁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신지요.
"9월에 디지털위성방송채널 시민방송(RTV)가 개국했어요(백낙청 교수는 시민방송 이사장이다). 국내에서 이름난 시민 단체들은 뉴미디어 능력이 한정돼 있더군요. 동호인모임이나 아마추어 제작자, 학생들이 방송 제작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당분간 시민 제작 참여율을 높이는데 노력을 기울이려고 합니다. 결국 내 본분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퇴임을 하면서 내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생기게 됐어요. 본분에 충실해야겠다는, '독기'가 차오릅니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 백낙청 연보
1938년 대구 출생
1955년 경기고 졸업 후 미국 브라운대 입학
1966년 계간 '창작과비평' 창간
1972년 D.H.로렌스 연구로 미국 하버드대서 박사 학위·서울대 영문과 조교수
1974년 민주회복국민선언 서명으로 파면
1976년 창작과비평사 대표
1977년 반공법 위반혐의 불구속 기소
1980년 서울대 복직
1996∼98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대산문학상(1993) 요산문학상(1997) 만해상(2001) 등 수상·은관문화훈장(1998) 수훈
평론집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민족문학의새 단계' '현대문학을 보는 시각' 사회과학연구서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 '흔들리는 분단체제' 중국어판 문학선집 '지구화 시대의 문학과 인간' 등
● 백낙청과 創批
1966년 1월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28세의 젊은 학자 백낙청씨가 '창작과비평'이라는 제호의 계간지를 창간했다. 서울 공평동 태을다방 옆에 자리한 조그만 출판사인 문우출판사라는 이름을 빌려서 발행된 문예지였다. "문학은 다른 분야가 맡기 힘든 또 하나의 중대한 소임을 갖게 되었다. 남북통일을 위한 소임이다." 창간사에서 밝힌 백낙청 교수의 신념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그는 문학이 역사와 사회 현실에 대해 능동적인 힘을 발휘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계간 '창비'를 통해 그 믿음을 실천했다.
1970, 80년대 군부독재의 폭압에 맞서 신경림 고은 김지하 김남주 박노해 등 행동하는 시인들이 창비를 통해 거센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황석영의 '객지' '한씨연대기', 이문구의 '관촌수필' 등의 소설이 창비 지면에 힘과 무게를 싣는 데 커다란 힘이 되었다. 폭력과 압제에 맞선 저항은 감옥 경험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창비 필자들에게 옥살이는 발표하는 작품 뒤에 따라붙는 것이었다. 문인들이 감옥을 드나든 것처럼 창비 잡지도 판금과 폐간 등의 시련을 겪었다. 그것은 3선 개헌, 유신, 긴급조치, 80년 서울의 봄, 87년 6월 항쟁 등 한국 현대사의 굴곡과도 겹쳐지는 것이었다.
백낙청씨가 비평가와 학자의 자리에만 머무르지 않듯 그가 주재하는 창비 역시 문예지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분단시대 역사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전개한 강만길씨, 민족경제론을 주창한 고(故) 박현채 등이 창비의 주요 필자로 참가했다. 브루스 커밍스, 이매뉴얼 월러스틴, 프레드릭 제임슨, 와다 하루키, 페리 앤더슨, 에드워드 사이드 같은 세계적인 석학들도 창비를 통해 대화했다. 우리 문제를 세계적인 시각으로 보는 한편 세계의 문제를 통해 우리의 논의를 심화하기 위한 의도였다. 이런 노력으로 '한국 자본주의 논쟁' '한국 사회계급론의 쟁점' '새로운 동아시아 연대의 모색' 등의 주제로 논문과 좌담을 게재하는 폭넓은 기획이 이어졌다.
2002년 겨울호의 특집은 대한민국의 변화와 개혁을 한반도 전체의 삶으로 확장하는 청사진을 제시한 '대한민국의 오늘, 내일의 코리아'이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국제정책연구소 아시아프로그램 소장인 셀리그 해리슨과 언론인 남재희씨, 전창환 한신대 교수, 김형기 경북대 교수 등이 필자로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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