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의 '국정원 도청 자료' 공개를 계기로 도청이 대선 쟁점으로 떠올랐다. 한나라당이 29일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의 사퇴를 요구한 데 대해 민주당은 '공작 정치'라고 반박하는 등 단순한 진실게임 수준을 넘었다. 양당은 이번 공방을 우열을 가리기 힘든 대선전의 첫 관문으로 여기고 자료의 진위, 출처 등을 두고 당력을 결집해 대응하고 있다.한나라당은 제보자가 국정원 직원이고, 국정원 유·무선 통신 감청팀의 도청 결과를 입수해 작성한 자료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공개한 자료는 전화통화 내용을 그대로 옮긴 녹취록이 아니어서 정확히 도청 결과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신건(辛建) 국정원장은 이날 "불법 도청한 사실은 결코 없다"고 부인하면서 "제3자가 만든 괴문서"라고 평가절하했다.
문제는 이번 '도청 자료'가 지난번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 의원이 폭로한 대북문제 관련 도청 자료 이상으로 대상 인물과 내용이 광범위하고 박관용(朴寬用) 국회의장이나 언론사 관계자를 비롯한 당사자들이 잇따라 실제 통화 내용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국정원은 이번에도 부인하기만 할 뿐 결정적 반증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한나라당이 앞으로 추가 공개할 내용을 지켜봐야 하겠지만, 일단 현재까지 공개된 자료는 크게 4가지로 성격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우선 한나라당 주장대로 국정원이 도·감청 결과를 요약했을 가능성이다. 민주당의 경선, 한나라당 내분 등 핵심 당직자 혹은 당사자 이외에는 알기 어려운 민감한 내용이 언급된 데다 전화 도청 요약 보고의 특징인 날짜 등이 정확히 기재돼 있다.
또 국정원 국회·정당팀이 동향 정보 등을 일부 사실 확인을 거쳐 종합해 보고서 형식으로 작성한 것일 수 있다. 실제로 국정원은 이런 방식으로 정국 흐름을 파악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단순한 동향 정보로 핵심 당직자들의 구체적 언급 내용까지 파악할 수 있었겠느냐는 의문은 남는다.
이 때문에 도·감청 경험과 노하우를 가진 국정원 전·현직 관련자가 정치적 목적에서 자체적으로 비밀리에 확보한 감청 자료일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된다. 이는 현재의 국정원 조직은 이번 도·감청 논란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신건 원장도 "국민의 정부 들어 지난 40년간 내려온 악습을 뿌리뽑았다"고 밝혀 국정원 출신이 도·감청 기술을 갖고 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국정원장 출신인 민주당 천용택(千容宅) 의원은 "공작정치와 정보정치의 경험을 가진 사람의 지휘 아래에 있는 사설 공작대에 의해 작성된 게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조직이 아니더라도 정치권 외곽의 각종 사조직이 민간 장비를 동원해 도·감청한 결과일 개연성도 있다. 민주당 이낙연(李洛淵)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한나라당 주변의 사설 도청팀이 내놓은 것일 수 있다"고 역공을 취했다.
결국 열쇠는 도·감청 문제를 제기한 한나라당과 이를 부인한 국정원이 쥐고 있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양측은 자기 주장을 관철해야 할 입장이다. 이 때문에 이번에도 사실 확인은 제쳐둔 채 정치 공방만 주고받다가 끝날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하다.
/이동준기자 d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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