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슨웹 기획·집필 푸른 역사 발행·1만5,000원실천적 지식인을 뜻하는 인텔리겐차라는 단어가 가슴을 뛰게 하던 시절이 있었다. 투쟁과 저항의 시대이던 한국의 1970∼80년대, 그것은 지성과 사회 변혁의 최전선에서 자랑스럽게 펄럭이던 깃발이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급속한 탈정치화와 보수화가 사회 전반을 휩쓸면서 인텔리겐차는 이제 냉소와 향수가 뒤섞인 채 흐릿한 안개 너머로 파묻힌 느낌이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저항과 투쟁의 시대를 지난 오늘날, 그들은 퇴물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다면, 또 그들이 멸종한 게 아니라면, 우리 시대 인텔리겐차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으며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웹진 '퍼슨웹'이 기획하고 집필한 '인텔리겐차'는 이런 질문에서 출발한다. 책은 지식인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앎과 삶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투쟁 중인 40대 학자 네 명을 심층 인터뷰해 오늘날 한국 지식인의 고민과 좌표, 지적 패러다임을 보여주고 있다. 인터뷰 사이 사이 관련 논문과 용어 해설을 실어 궁금증을 해소해준다.
선택된 모델은 장석만(47·한국종교문제연구소 연구원) 윤해동(44·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고미숙(42·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연구원) 김동춘(43·성공회대 사회과학부 및 NGO학과 교수)이다. 이들은 대학 시스템의 바깥에서 자유롭게 유영하거나, 대학 내부에서 변화를 만들어가며 현실에 대해 꾸준히 발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문의 길과 지식인의 삶을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새로운 대안 혹은 가능성으로 비쳐지고 있다.
이들은 종교학 역사학 고전문학 사회학이라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공간적·세대적 동질성과 공통된 인식의 기반을 갖고 있다. 모두 70년대 중·후반에 대학을 다니기 시작해 학생운동과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받았고, 80년대의 열정이 90년대의 환멸로 바뀌는 것을 겪으면서도 거기 굴복하지 않고 각자 나름대로 학문과 실천의 길을 병행하고 있다. 또 마르크스주의와 '한국적 근대'에 대한 반성을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각 분야의 훈련된 인터뷰어들은 이들의 삶과 사상을 파고들어 속깊은 이야기를 끌어내고 있다. 학문의 길에 들어선 동기와 지금 부닥친 학문적 고민, 한국 사회와 학계, 지식인과 대학의 문제 등이 문답의 주요 내용을 이룬다. 각자의 연구 주제를 중심으로 근대성, 민족주의, 마르크스주의 등에 관한 다소 전문적인 논의와 더불어 지식인으로서 그들 내부에 숨쉬고 있는 열정과 불안도 전달하고 있다.
인터뷰에서 기대하는 개인적 체취는 고미숙에게서 가장 잘 느껴진다. 제도권 밖의 학문 공동체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를 운영하고 있는 그는 '자유롭기 위해' 학문을 택했다고 말한다.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동안 글쓰기의 자유로움, 앎의 자유로움에 목말랐다"는 그는 "지식을 통해 자유로울 수 있다면 한 번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을 수유연구실에서 동료들과 함께 실천하고 있다.
중국 명나라 시대 신유학을 일으킨 왕양명을 떠올릴 때 그는 흥분어린 목소리로 멋진 지식 공동체에 대한 열망을 말한다. 장군이었던 왕양명은 전장에서 돌아오면 수 천 명 제자와 강학을 했는데, 숙소가 좁아 번갈아 잘 때 안에 못들어간 무리는 밤새 밖에서 시를 읊고 노래를 했다고 한다. "상상해보라, 가슴이 벅차지 않은가. 이럴 때 지식은 삶 그 자체다."
학문적 자유, 이를 통한 삶의 해방을 위해 그는 "좀더 과격한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장석만도 '식민화한 상상력' '근대성의 포로'로 매여있는 상상력을 푸는 작업이 절실하다고 동조한다. 윤해동은 지난 100년간 한국사 연구의 기반이 되어온 민족주의가 우리의 상상력을 질식시켰다고 질타한다.
대학과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발언은 좀 더 신랄하다. 김동춘은 "사회학뿐 아니라 한국의 학계 전반이 침몰하는 배와 같다"면서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학문사회의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학문의 자유로운 성장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장석만도 "근대성의 자기성찰 공간이 되어야 할 대학에서 교수들은 철저히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고 공격한다.
지식인 위기론과 관련해 고미숙은 "지식과 일상을 분리하는 이분법이 지식인을 무력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삶과 앎을 결합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김동춘이 생각하는 지식인상은 '현실에 대한 해석자'다. 지식인은 현실 문제를 자기 문제로 인식하고 어떤 형태로든 개입해야 한다고 믿는 그는 참여연대와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 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상아탑 안팎의 삶을 연결하고 있다.
이 책은 70∼90년대 한국 지식인의 변천사로도 유익하다. 인터뷰 대상 4명이 걸어온 궤적에 시대의 지문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10년, 20년 뒤 이들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그때 이들을 다시 인터뷰한다면, 이들이 어떤 말을 들려주게 될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 종단 인터뷰는 좀 더 적나라하게 각자의 체온과 냄새를 전해주었으면 한다. 우리는 그들의 머릿 속 생각 뿐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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