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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모나미 인생 송삼석(9) 이병철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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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모나미 인생 송삼석(9) 이병철 회장

입력
2002.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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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흑백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르는 일이 있다. 중소기업으로서는 파격적인 규모로 광고를 하자 나도 덩달아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광고 업무는 모두 실무진에게 일임한 상태였지만 회사 대표로서 이런저런 광고 관련 행사나 모임에 초청받는 일이 잦았다.그 중에서도 나는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李秉喆) 회장과의 만남을 잊지 못한다. 1968년 6월 이 회장은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을 거느린 중앙매스콤 회장 자격으로 주요 광고주인 기업체 대표 30여명을 안양CC(현 안양베네스트CC)로 초청, 친선 골프대회를 열었다. 참석한 대기업들과 모나미의 사세(社勢)만 놓고 보면 내가 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지만 광고 물량 만큼은 여느 대기업에 뒤지지 않아 당당히 초청을 받은 것이다.

경기 시작은 오전 10시였지만 나는 오전 8시쯤 골프장에 도착해 맨 먼저 등록을 한 뒤 연습을 했다.

난 원래 지기 싫어하는 성미다. 골프는 36세때인 1964년 의사인 형님들의 권유로 충무로 회사 근처 건물 지하에 있던 실내연습장을 다니면서 시작했다. 그 연습장은 국악인 안비취씨가 국내 최초로 세운 실내 골프연습장이었다. 1년 동안 거의 매일 공 500개를 친 덕에 몸무게를 10㎏이나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친구들과 처음 간 골프장에서 나는 셀 수 없을 만큼의 스코어를 기록, 스트로크 게임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그 뒤 이를 악물고 레슨을 받아 1년 뒤에는 핸디캡 8의 싱글이 됐다.

그날 나는 "이 회장이 참석한 대회에서 대기업 사장들을 제치고 우승을 해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대회 시작을 앞두고 삼성의 임원 한 명이 이 회장에게 "1조(組) 편성을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었다. 이 회장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골프장 도착 순서대로 해." 그 임원은 이 회장에게 어느 대기업 대표들과 운동을 하시겠냐고 물은 것이었다. 나 같은 중소기업 대표는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회장은 누구도 불만을 제기할 수 없도록 '도착순'이라는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덕분에 골프장에 가장 먼저 온 나는 이 회장과 한 조가 됐고, 지금도 친선 골프대회가 열리면 '도착순' 조 편성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운동을 하는 동안 이 회장과 난 기업 경영에 관한 것들을 화제로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그분은 말씀을 많이 하시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9홀을 마치고 클럽하우스에서 냉면을 먹을 때 나는 은근히 장난기가 발동했다. 이 회장이 과연 어떤 분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마침 식탁 위에 놓여있던 제일제당의 미풍이 눈에 띄길래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아지노모토(味元)가 불경기에 여름 장마까지 겹쳐 쌓여가는 재고 처리를 위해 사원 아이디어를 모았답니다. 그중 채택된 아이디어가 조미료가 배출되는 구멍을 종전 크기의 2배로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기존보다 조미료 소비를 2배 이상 늘릴 수 있다는 거죠. 회사측은 덕분에 재고를 모두 처리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주부들도 만만치 않았죠. 조미료 구멍의 절반 가량을 막고 쓰는 방법을 고안해냈던 겁니다. 이를 안 회사측은 즉시 구멍을 예전 크기로 환원시켰습니다. 미풍도 구멍을 크게 하는 방법을 한번 써보는 게 어떻습니까." 이 회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기업인은 절대 그런 식으로 소비자를 우롱해선 안됩니다. 소비자는 왕입니다. 기업은 정도 경영으로 소비자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날 이 회장의 언행은 두고두고 내 가슴 속에 살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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