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풍상호신용금고 사장을 마지막으로 지난해 퇴직한 김기선(金基善·59)씨가 인생후반기를 맞아 선택한 새로운 직업은 택시기사이다. '페달 밟을 힘만 있다면 언제까지 할 수 있는 일'로 소신을 갖고 선택한 일이지만, 승용차 뒷좌석에만 앉아있던 그에게 택시기사 일이 편안할 리가 없다. 그러나 어려움보다 장점을 더 많이 꼽는 그는 현역이었을 때의 위치에 연연해 아무 일도 못하거나, 자식, 며느리 흉으로 소일하는 노후를 거부한다. 자신감을 갖고 친절한 택시기사로 이미지를 바꾸는 것이 정년 이후 그의 새로운 도전이 됐다.
나는 1963년 한창 은행의 인기가 좋았을 때 서울은행에 입사 했고, 단자회사의 대우가 좋을 때 중앙투자금융으로 전직했다. 상호신용금고들이 성장할 때에는 영풍상호신용금고 대표이사로 선임돼 3년 연임을 했으니 '직장 운은 좋았다'고 자부한다.
2001년 금융업을 마감하고 평소 희망하던 택시기사로 자리를 바꾼 후 1년 가량이 된다. '전직보다 현직이 좋다'는 나의 직장 운대로 이번에도 '정말 잘 바꾸었구나' 라는 생각이다.
택시기사를 하려고 마음먹은 것이 10년쯤 되니, 전직이 나에게 전혀 엉뚱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에게는 의외인 모양이다. 최근 전직 부하 직원의 상가에 문상을 가서 택시기사를 한다고 하니 그 직원은 '평소 퇴직하면 택시기사를 하겠다고 하시더니 정말이시냐?'고 놀란다.
내가 택시기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고령화시대에는 누구나 평생직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사회는 퇴직 시기가 앞당겨져 50세쯤 되면 직장을 나와야 하지만 평균수명은 80세로 길어져 30년 가까이 제 3의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제 3의 인생을 보람차게 지내려면 '건강과 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나이가 들면 정신적인 노동보다 단순 육체 노동이 좋은 것 같다.
물론 택시기사의 어려움도 있다. 위험부담이 많고 육체적으로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도전해 볼 만한 직업이 아닌가? 안전하고 쉬우면 우리처럼 나이가 든 사람들에게까지 차례가 오겠는가? 기사 자격시험에 합격해 적성검사까지 끝내고 택시운전자격증을 손에 들고 교통회관 밖으로 나오던 날, 택시회사에서 나온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나를 데려가려고 경쟁을 벌였다. 환갑이 다 된 퇴직자를 이렇게 환영하는 데가 또 어디 있을까. 내가 듣기로는 여든을 넘긴 나이로 택시기사를 하는 사람이 전국에 150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항상 일이 있고, 자유로우며, 힘들면 조용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등 누구의 간섭과 규제가 없는 것이 택시기사 일의 장점이다. 열심히 일을 하니 음식 맛이 좋고, 잠이 잘 온다. 노동후의 성취감과 다양한 손님들과의 만남과 대화는 수익 이외에 덤으로 얻는 즐거움이다.
물론 평생 책상 앞에서 일해 온 나에게 택시기사 일이 쉬울 리 없다. 일을 시작한 후 한 달 만에 몸무게가 5㎏ 이상 줄었으며, 자동변속기가 아닌 수동변속기를 조작하느라 발목이 아파서 3개월 정도 침을 맞고 물리치료를 받아야 했다. 아내는 처음에는 냉담했다. 그러나 내가 소신을 갖고즐겁게 일하는 것을 보더니 마음을 바꾼 모양이다. 요즘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챙겨준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용기가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수익은 퇴직전과 비교하면 4분의 1에도 미치지 않는 수준이다. 그러나 돈을 목적으로 수익에 아등바등하지 않기 때문에 한결 여유가 있다. 오후 5시30분에 일을 마치면 골프연습을 하거나 바둑을 두고, 아내와 오순도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노인들이 할 일 없이 모여 앉아 고스톱이나 치고 주변 사람들 흉이나 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아서 좋다. 그것만큼 황혼을 무익하게 보내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노인들이 구두닦이도 하고 여관 벨보이도 한다. 늙어서도 일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진짜 노후대책이 아닐까.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퇴임 후 외교사절과 사랑의 집짓기 운동으로 더 존경을 받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들도 거제도에 가서 멸치를 잡고, 합천에 가서 농사를 짓고, 섬유경기 안 좋은 대구에 가서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일한다면 국민들에게 얼마나 존경 받겠는가? 내가 과거에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현재 내가 어떻게 살아 가느냐가 중요하다. 어느 정도 생활의 여유가 있다고 맥없이 놀고 먹는 것은 삶이라기 보다 목숨의 연장에 불과할 것이다. 유럽에서 양을 기르는 농가가 겨울에 늑대가 양을 물어가는 것을 보고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철조망을 쳤다. 그랬더니 양들이 긴장이 풀려 잡혀가던 숫자의 몇 배가 추위에 얼어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의 삶도 때로는 긴장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침에 귤을 한 바구니 준비해서 택시에 오른다. 손님에게 하는 일종의 투자다. 사실 택시승객은 한 번 내리면 그만. 다시 내 택시를 기억해서 탈 리 없지만 서비스와 친절을 베푸는 것은 택시기사 전체의 이미지를 좋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앞으로 남은 30년을 향해 나는 오늘도 핸들을 잡고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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