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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얄개 돌아오다/ 70년대 하이틴 스타 이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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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얄개 돌아오다/ 70년대 하이틴 스타 이승현

입력
2002.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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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고교 2학년인 이군은 '고교얄개'에 주연으로 출연했는데 뜻밖에 큰 '히트' 여기저기 출연교섭을 받고 있다…. 임예진양이 독주하던 여고생물 '붐'이 이군을 주인공으로 한 남고생물로 다양화되는 느낌…." 1977년 3월의 한 주간지 기사다. 얄개가 돌아왔다. 영화 '고교 얄개'로 70년대 후반 하이틴 영화 전성기를 이끌었던 영화배우 이승현(41)이 오랜 공백을 깨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승현은 70년대 후반 하이틴물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80년 이후 활동이 뜸해졌고, 86년 캐나다로 간 뒤부터 사람들 뇌리에서 잊혀져갔다. 팬들이 그의 모습을 다시 본 것은 12∼15일 KBS 1TV 휴먼다큐멘터리 '인간극장―얄개는 울지 않는다' 4부작을 통해서였다. 여인숙에서 생활하는 영락한 신세였다. 쾌활하던 옛모습은 간 데가 없었다. 이승현과는 연락이 쉽게 닿지 않았다. 휴대폰도 매니저도 없이 서울과 대전을 오가며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는 그를 어렵게 만났다. 오전 10시에 만나기로 한 뒤 아무런 연락도 없이 바람을 맞힌 그는 저녁 즈음이 되서야 다시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왔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강남역 부근에서 그를 만났다.―너무 오랜만에 영화계로 돌아온 것 같다.

"'99년에 '블루스'라는 작품으로 처음 복귀했는데 흥행에 실패했다(97년 '스커트 속의 드라마'라는 영화가 복귀작이지만 여기에 대해 그는 언급하지 않았다). 영화판이 많이 바뀌어서 아는 얼굴도 없으니까 다른 작품들을 하기가 어려웠다. (최근 단역으로 나온) '남자 태어나다'라는 영화도 하루 만에 간판을 내렸다. 영화감독을 해보려고 2000년에 후배인 영화배우 성인성(33)과 충남 아산에 대한영화사를 차렸지만 사기를 당해 엎어지고 말았다."

―오랜 동안 해외에 나가 있었던 이유는.

"85년에 '삿갓 쓴 쟝고'를 찍은 뒤 이듬 해 캐나다로 떠났다(86년 '가까이 더 가까이'라는 영화가 있지만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집에서는 외아들인 내가 영화를 그만 두고 외교관이 되기를 바랐다. 영화계에서 활동도 뜸해지고 외국으로 나간다는 들뜬 마음에 결국 가게 되었다. 달랑 3,000달러 들고 캐나다엘 갔다. 연고도 없었다. 8년 동안 밑바닥 생활도 했고 방황도 많이 했다. 화장실 청소도 하고 골프장에서 밤새 지렁이를 잡기도 했다. 지렁이는 립스틱 원료였는데, 한 마리에 캐나다달러로 50센트를 받았다.

―정상에 있던 스타였는데 그렇게 어려웠나.

"받은 것보다 나간 게 더 많았다. 학생 신분에 얼마나 받았겠나… 100만원 받고 '고교얄개'를 했다('고교얄개'는 당시 관객 26만명을 모았다). 학생 신분으로는 최고 개런티였다. 외국에서는 내가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었다. 어머니가 한의사로 해외 선교를 하셨기 때문이다. 이후 93년에 필리핀에 가서 신학 대학을 다녔다. 어머니가 선교사 일을 하라고 종용하셨다. 거기서 집사람도 만났다. 신학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중간에 그만 두었다. 95년에 대전에서 결혼했고, 97년에 한국에 정착했다(현재 그는 아내와 별거중이다)."

―영화에 대한 미련 때문에 힘들지 않았나.

"대전에서 살면서 만두가게도 했고 여러 가지를 해봤다. 달리 취직을 할 수도 없었고…. 주위에서 다시 영화를 해보라는 권유가 많았다. 외국에 나가 있어도 나는 항상 배우라는 자부심을 잊지 않고 살았다. 신이 주신 달란트(재능)를 썩혀가면서까지 다른 걸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방송에 나갈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사생활까지 다 찍으니까 사실 나갈 생각이 없었다…. 담당 PD가 후배 배우인데, 계속 하자고 졸랐다. 아직은 화면에 비쳐질 때가 아닌 것 같다. 몸도 이렇게 불었고(전성기 때의 그는 63㎏. 지금은 85㎏이다). 그래도 나를 많이 알리게 된 계기가 됐다."

―정상에 있다가 단역 배우로 다시 출발하는 심정이 어떤가.

"지나간 거는 지나간 거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현실이 중요하다. 정으로 봐주는 시대는 아니니까. 촬영 현장에서는 다 모르는 사람들이고 나 혼자니까 적적하다. 내가 누구인지 젊은 친구들이 어떻게 알겠나. 소외된 기분을 느낀다. 기획사 중심으로 돌아가는 시스템 등 연예계가 180도 바뀌었다. 돈만 알고, 끈끈한 정도 사라지고, 선배에 대한 예우도 없어졌다."

―아역 배우 출신으로 당시 함께 했던 배우들과는 교류가 있는지.

"아역배우 출신들은 고비가 있다. 그걸 넘기기가 힘들다… 옛날에 알아줬던 게 무슨 소용인가. 방송 나간 뒤 진유영씨와는 연락을 했다. (김)정훈이는… 만날 일이 없었다."

―3,000원짜리 국밥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1만원짜리 여인숙을 전전하는 모습을 보고 시청자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내 나름대로는 발버둥쳤다. 정말 죽고싶은 마음도 많았다. 정 안되면 보따리 싸고, 다시 어머니에게 가려고 했다."

―비중 있는 조연을 맡게 되었는데.

" '학교를 털어라'(감독 김종석)에서 형사 반장 역을 맡았다. 12월말부터 촬영에 들어간다."

―후원회가 생겼다고 들었다.

"후원회 도움으로 내년에는 영화 감독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 지금까지 고생은 감독이 되기 위한 적응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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