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대학은 지식 생산의 대표적 장으로 꼽힌다.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수 역시 특정 직업군의 의미를 넘어 지식인과 동일어로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다.그러나 이들이 과연 현실의 문제를 분석하고 개혁하는 지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고루한 '지적 기득권 집단'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비판이 비등하다.
계간 '사회비평' 겨울호(28일 발간 예정)는 '학술권력과 글쓰기'란 특집에서 이러한 현상을 낳는 '학술 권력'의 메커니즘을 조목조목 분석, 눈길을 끈다.
형식만 갖춘 학술 논문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고 여기에 기계적 평가의 잣대를 들이대는 현행 학계의 비뚤어진 풍토가 자유로운 글쓰기를 제약하고 나아가 학문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장덕현 부산대 문헌정보학과 교수는 학술진흥재단(학진)이 교육인적자원부의 지원을 받아 시행하는 '학술지 평가 사업'을 학술담론의 생산과 유통을 왜곡하는 대표적 사례로 꼽는다.
이 사업은 국내 학술연구의 역량 강화 등을 목표로 우수학술지 색인을 만들고 등재 여부를 평가하는 제도로, 향후 미국 과학정보연구원의 SCI(Science Citation Index)와 같은 인용계량 평가를 도입할 예정이다. 문제는 이 제도가 정확한 학술정보 제공이라는 취지에서 벗어나 학술지의 서열화를 야기하고, 나아가 비등재 학술지에 수록된 논문이 연구 성과로 인정받지 못해 해당 교수가 업적 평가에서 불이익을 받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점이다.
또 우수학술지 등재 여부가 학회의 권위를 판가름하는 '인증서'로 작용해 학회마다 회원수를 늘리는데 혈안이 돼 있고, 소규모 학회들이 수록 원고를 찾지 못해 도태 위기를 맞는 등 부작용이 적지 않다. 장 교수는 "학진의 정책은 주류에 편승하지 않는 주변부 학문의 설 자리를 없애버리고 있다"면서 "학술지 평가가 꼭 필요하다면 제3의 민간기구에 위임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대학도 이를 교수 업적평가에 남용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정환 서울대 강사(국문학)도 학진의 평가 이후 변화한 학계의 풍토를 비판한 글에서 "학진의 연구비 지원 확대가 연구의 진작이나 학문위기 해소에 기여하기는커녕 학자들 사이에서는 1,2년간 국가로부터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다"고 지적했다.
시인 장석주씨는 마광수 전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의 재임용 탈락사건을 통해 대학 사회의 닫힌 글쓰기 문화를 비판했다. 장씨는 1편의 논문과 함께 문화비평집 소설 시 등을 업적물로 제출한 마씨에 대해 대학측이 '학문적 능력의 결함'을 이유로 재임용 불가 결정을 내린 것을 "자유주의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글쓰기 방식과 학술 논문만을 중요 연구업적으로 인정하는 제도화된 학술 권력의 경직된 평가기준이 정면으로 충돌한 것"으로 평가했다.
그는 "마씨가 시도한 비전형적, 비형식적 글쓰기를 '잡문'으로 평가절하하고, '아카데믹하고 현학적인' 논문 형식의 글쓰기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풍토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영민 한일장신대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도 학문에 담긴 '뜻'만을 다룰 뿐 이를 '글'로 풀어내는 방식에는 주목하지 않는 현행 교수업적 평가제도로는 식민화한 글쓰기에 젖은 학계 풍토를 개선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인식과 관념이 소비 채널을 통해서 피상적으로 유통·소비될 뿐, 내 글로, 내 몸으로, 내 삶으로 낮아지지 못하는 구조 속에서 학자의 대다수는 '지식의 소매상'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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