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의 집단안보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담이 21일 체코 프라하에서 열렸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등 19개 회원국 정상들은 이날 옛 동구권 7개국의 신규 회원 가입을 승인함으로써 과거 주적(主敵)이었던 소련의 위성국까지 아우르는 거대 나토를 탄생시켰다.그러나 외형상 성공적인 몸집 불리기에도 불구하고 나토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 지난해 9·11 테러 이후 변화한 안보 환경에서 나토가 과연 나름의 위치를 찾을 것인지 아니면 미국의 심부름꾼으로 전락할 것인지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반 공산 연대에서 반 테러 연대로
1949년 창설 이후 50여 년 간 나토는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91년 소련이 무너지기 전까지 나토는 동구 공산권의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맞서 미국과 유럽의 자본주의권을 지키는 방어 기구 성격을 띠었다.
하지만 냉전 붕괴 후 나토는 심각한 존재의 위기를 겪는다. 적이 없어진 것이다. 이때 미국의 주도로 도입된 신전략 개념이 범유럽 안보기구로서의 역할이다. 유럽 일부 지역에서 발생하는 불안정이 전체 회원국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워 나토는 99년 유엔 결의 없이 코소보를 단독으로 공습하기도 했다.
지난해 9·11 테러는 나토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세계적인 테러 위협은 눈에 보이는 전선도 없을 뿐더러 작전 지역도 북대서양 양쪽의 역내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미국은 이런 이유를 들어 신속배치군 창설을 주장했으며 이번 회의에서 이를 관철시켰다.
■신속배치군 창설
나토는 이번 회의에서 회원국 확대를 결정, 마지막 남아 있던 냉전의 흔적을 완전히 제거했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해 연안 3개국과 루마니아, 불가리아,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등 동유럽 4개국 등 옛 동구권 7개국이 회원국으로 영입되면서 이제 유럽 대륙에서 나토 회원이 아닌 나라는 유고, 스위스와 같은 분쟁국이나 중립국만 남게 됐다.
기구 확대 못지 않게 중요한 의제는 신속배치군 창설로 대표되는 나토의 방향 재설정이다. 테러리스트나 불량 국가의 위협을 대상으로 하는 신속배치군 창설은 옛 소련권에 맞서 방어기구로 출발한 나토의 전략이 근본적으로 바뀜을 의미한다. 나토는 유럽연합(EU)이 추진 중인 6만 명 규모의 EU 신속대응군 창설 계획과 별도로 도널드 럼스펠드 미국 국방부장관이 제안한 2만 명 규모의 신속배치군 창설을 이번 정상회담에서 공식 수락했다. 그동안 유럽과 북미, 그 인근 지역으로 제한됐던 나토군의 작전 지역은 신속배치군 설치와 함께 전세계로 확대된다.
여기에 미국은 나토의 군사력 강화를 위해 각국에 방위예산 증강을 요구하는 한편, 미군과 큰 격차를 보이고 있는 나토군의 군사장비 현대화 계획 등을 논의한다. 또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유엔 무기사찰단의 활동이 본격화한 가운데 이라크의 무장해제 방안도 집중 논의할 예정이다.
■미―유럽 갈등
많은 미국과 유럽 언론들은 이번 회담의 핵심이 회원국 확대가 아닌 나토의 위상 재정립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지난 10년 간 나토가 '주적이 사라진 승리자'로 버텨왔지만 테러라는 보이지 않는 적이 나타난 지금,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자칫 덩치만 큰 '정치 클럽'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임스 슐레징어 전 미국 국방부장관은 "소련 붕괴 후 나토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군사 능력이 아니라 조약 자체의 심리적 접합력"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전망의 이면에는 서로 다른 시각을 지닌 미국과 유럽의 갈등이 자리하고 있다.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북한 등 여러 개의 전선을 갖게 된 미국은 유사시 대체 투입할 나토군의 활동 범위 확장과 전력 강화를 바라고 있는 반면, 유럽 국가들은 나토가 미국식 일방주의의 전위 부대가 되는 것에 반감을 갖고 있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그어놓은 전선에 나토라는 명분으로 휘둘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독일, 프랑스가 주축을 이룬 유럽측은 나토가 유럽 방위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며 반기를 들고 있다.
미·유럽의 이같은 갈등은 신속배치군 창설을 위해 필요한 예산 지원 능력 차이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미국이 하루에 쓰는 국방예산(1억 달러)은 16개 유럽 회원국 전체의 그것보다 두 배나 많을 정도로 양자 간 힘의 우열은 이미 어른과 아이 수준을 넘어섰다. 조지 로버트슨 나토 사무총장은 "유럽이 군사 능력을 향상시키지 못하면 결국 '피그미족'으로 남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뉴욕 타임스는 "유럽측 국방 예산의 한계와 넘을 수 없는 양자 간의 군사력 차이,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한 유럽 내 정치적 견해 차이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나토가 세계적인 군사동맹체로 거듭나는 데는 수 년 이상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러 "꺼림칙하지만…" 東進 묵인
21, 22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확대정상회담이 열리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 정상회담에 참석한 러시아 관리들은 34년 전 체코의 민주화 운동(프라하의 봄)을 제압하기 위해 구 소련 탱크들이 도심을 누비던 이 곳에서 나토 정상회담이 열리는 데 대해 만감이 교차할 것 같다. 나토에 대항하는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일원이었던 체코는 이제 나토 회원국으로 바뀌었고 더이상 구 소련의 꼭두각시 국가도 아니다.
무엇보다 러시아 스스로가 큰 변신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 냉전시대에 나토의 주적으로 대항했던 러시아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사상 처음 나토의 파트너로 참가하고 있다. 러시아는 5월 국제테러를 비롯한 안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공동 의사결정기구인 나토-러시아 회의를 설치, 40년 냉전의 장례식을 치른 바 있다. 이를 통해 러시아는 거부권만 없을 뿐 사실상 나토 회원국과 동등한 자격을 갖게 됐다. 러시아는 이번 정상회담에 이고리 이바노프 외무장관이 참석해 나토+러시아 정상회담을 주재할 예정이다.
특히 러시아는 구 소련 공화국이던 라트비아, 슬로베니아 등 발트 3개국을 포함, 동구권 7개국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이는 나토의 동진정책에 대해서도 당초 우려와는 달리 입을 다물고 있다. 1999년 체코, 폴란드, 헝가리 등 동유럽 3개국의 나토 가입에 극력 반대했던 러시아는 이번 동구 7개국 가입에도 자국의 안보 위협을 이유로 내세우며 줄곧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여 왔다. 하지만 나토에 파견된 발렌틴 쿠즈네초프 러시아 대표는 "나토와 함께 많은 일을 하면서 서로 더 잘 이해하게 될수록 우리의 안보상황도 더욱 강해질 것"이라며 나토의 동진 전략을 암묵적으로 승인했다.
러시아와 나토의 이같은 화학적 융합에는 적지 않은 부작용이 예고돼 있다. 먼저 나토와의 협력체제가 실속을 기대할 수 없는 정치적 쇼에 가까우며 나토는 러시아의 여전히 잠재적인 적일 뿐이라는 러시아 내부의 비판이 만만찮다. 빅터 일류킨 공산당 의원은 "워싱턴이 싫어하는 나라의 정권을 겨냥하고 있는 나토는 미국의 손바닥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러시아에 대한 나토의 최종 목적은 자원 확보에 있다"고 거부감을 표시했다.
러시아가 그루지야와 몰도바 등 구 소련 공화국으로부터 군대를 철수하지 않고 있는 점도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가 철군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경고하는 것에 대해 러시아는 철군 문제는 나토와의 협약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김병주기자 bj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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