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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현장/ "방·알바 먼저 구해놓고 가출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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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현장/ "방·알바 먼저 구해놓고 가출하죠"

입력
2002.1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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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해서 춥고 배고프게 지내는 건 옛날 얘기예요." 20일 새벽1시 서울 대학로의 한 PC방. 가출 5일째인 정모(16·K중 3)양은 유명 포털 사이트에 접속, '가출방'에 찾아 들어가고 있었다. 10분 남짓 채팅을 했을까. 정양은 "인터넷에서 처음 만난 친구 3명이랑 월 5만원씩 내 방을 구하기로 했다"며 의기양양했다. "핸드폰 많이 썼다고 엄마한테 혼나고, 엄마 아빠가 오빠한테만 잘해 주는 게 싫어서 나왔어요." 잠시 고개를 떨군 정양은 "돈을 어떻게 버냐고요? 단란주점 아니면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 하면 돼요"라며 PC방을 나섰다.

■ '여학생 폭행치사' 계기 기획가출 우려

'다 준비해놓고 가출해요'

가출 청소년들이 10대 여학생에게 집단 폭행을 가해 숨지게 한 사건이 큰 충격을 던지면서 청소년 가출의 실상에 대한 관심과 우려가 커지고 있다.

통계상 가출 청소년은 지난해 1만8,276명에서 올 10월 현재 1만2,812명으로 줄었다. 그러나 행태변화를 보면 섬뜩한 느낌 마저 든다. 단기간 가출, 풍찬노숙(風餐露宿)이 예전의 방식이라면 미리 기거할 방과 일 자리를 구한 뒤 장기간 돈을 벌며 생활하는 '기획성 가출'이 급증하고 있다.

19일 오후 서울 동대문 M쇼핑센터 앞에서 만난 박모(17·고1중퇴)군은 자신을 "베테랑 가출소년"이라고 자랑했다. 이번엔 일자리를 알아보는 등 단단히 준비하고 가출했다는 그는 2개월째 안정적인 가출 생활을 하고 있다. "노원역 근처 야식집에서 밤12시부터 새벽4시까지 오토바이로 배달해요. 시간당 5,000원이면 먹고 살만하거든요." 일이 끝나면 박군은 같이 가출한 친구와 함께 구한 월세 20만원짜리 신촌의 자취방에서 잠을 잔 뒤 오후에 PC방에서 게임을 하는 등 나름대로의 삶을 즐기고 있다.

2주일 전 집을 나와 중국집 배달원 일을 하고 있는 최모(18)군은 "신촌 등 사글세 쪽방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출한 애들이 남녀 구분 없이 삼삼오오 모여 살고 있다"고 귀띔했다.

가출 부추기는 '인터넷 가출방'

최근 들어서는 '인터넷 가출방'이 유행하면서 기획성 가출을 더욱 부추긴다. 가출방은 이미 유명 포털 사이트마다 수십개씩 개설돼 있었다. 회원이 800여명인 D사이트의 한 가출방 게시판에는 같이 방을 사용할 사람 구한다거나 여성 청소년에게 숙식을 제공한다는 술집과 다방의 광고문이 숱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가출을 하려는 데 정보를 좀 달라", "여자 가출자 동거인 구함", "월 5만원 내고 같이 잘 사람 구함" 등의 글이 게재된 다른 포털 사이트의 한 가출방에는 접속 건수가 연일 수백건에 달하고 있다. 대학로에서 만난 김모(15·중3)군은 "'가출방'이 '가출 학교'로 불릴 정도로 또래 친구들 사이에 인기"라고 전했다.

청소년의 장기간 기획성 가출은 상당수가 폭력 절도 매매춘 등 범죄에 노출되기 마련. 최근 발생한 '10대 팬클럽 여학생 폭행치사' 사건도 장기 가출 청소년에 의해 저질러졌다. 특히 여성 가출 청소년의 경우 지난달 청소년보호위원회의 조사결과 3명중 1명 꼴인 34%가 성폭행을 당하거나 성매매를 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드러날 정도로 성범죄에 광범위하게 노출돼 있다. 지난달 가출한 김모(17)양은 가출 1개월 만에 유흥주점 접대부로 전락했다. 집에서 30만원을 훔쳐 가출했지만 여자라서 마땅히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

정부가 나서 대책 마련해야

그렇다면 이들은 왜 집을 나올까. 청보위 조사결과, 가출 청소년 중 34%정도가 '부모와의 갈등' 때문이었고, 13.4%는 공부에 대한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나온 것으로 나타났다. 부모의 지나친 기대(7.7%), 학교생활 싫증(3.7%), 부모의 무관심(2.5%), 부모의 폭행(1.8%) 등도 가출 이유였다.

서울 YMCA 청소년 쉼터 관계자는 "가출사이트로 인해 정보공유가 늘어나면서 가출이 장기화, 만성화되고 있다"며 "우선적으로 부모의 학교의 인식변화가 필요하며 정부도 적극 나서 가출 청소년을 위한 안정적인 쉼터 시설과 교육프로그램을 확보하는 게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고성호기자 sungho@hk.co.kr

강철원기자 strong@hk.co.kr

■ 가출청소년 실태

해마다 거리로 나오는 청소년들은 10만여명을 넘어선다(경찰청 추산). 가출 연령도 해마다 낮아져 길거리 생활을 하는 청소년 중 10% 가량은 아직 부모의 따뜻한 보호가 절실한 초등학교 1∼3학년생들이다.

청소년보호위원회가 올해 7월 전국의 중·고교 남녀 재학생 1만3,051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의 8.5%에 이르는 청소년들이 '가출 경험이 있다'고 답했으며 '가출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48.4%에 달했다.

가출 후 마땅히 갈 곳이 없는 청소년들은 공원, 공중화장실, 벤치 등을 배회하며 생활한다. 서울 지역에서는 두산타워, 밀리오레 등 대형 의류상가가 밀집한 동대문 일대, 여의도 한강공원 등 주로 밤늦게까지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곳이 가출 청소년들의 집결지. 가출 경험이 있는 응답자의 23.4%는 '가출 후 여관, 여인숙 등에서 잠을 잤다'고 대답했으며 '길거리, 빈집, 계단 등에서 주로 밤을 보냈다'는 청소년도 9%에 달했다.

가출 청소년들 대부분은 생존을 위해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고 상당수는 자연스레 성매매나 폭력집단 등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가출 경험이 있는 청소년 중 '성매매 경험이 있다'고 답한 청소년이 무려 19.7%에 이른다.

하지만 이들은 성관계 경험에도 불구하고 성지식이 부족해 여자 청소년의 경우 어린나이에 원치않는 임신과 낙태를 경험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대한가족보건복지협회가 5월 선도보호시설에 입소해 있는 여자 10대 가출 청소년 4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86%가 성관계를 경험했다고 대답했고 24.3%는 임신한 경험이 있지만 이 중 66.7%가 그 해결 방법으로 낙태를 선택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지향기자

■ 전문가 의견

청소년 가출은 청소년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들은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회에서도 '문제아'로 낙인 찍혀 버림받았다는 점에서 가정과 사회의 희생자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이들의 재가출을 막고 사회와 가정으로 완전한 복귀를 이끌어낼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 구축이 기성세대의 '의무'라고 입을 모은다.

YMCA 청소년쉼터 박금혜(朴琴惠) 실장은 가출 원인의 변화에 주목한다. 박실장은 "과거 개인적인 자유와 쾌락을 찾아 나선 '유흥형가출'이 청소년 가출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것과 달리 최근에는 가정의 경제적 몰락이나 부모의 이혼 등의 이유로 집에서 내몰리다시피 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이들이 장단기간 머무를 수 있는 '쉼터'의 확대가 절실하다. 92년 전국 각지에 문을 연 청소년쉼터는 현재 전국에 25개소가 운영되고 있지만 총 수용능력이 663명에 불과한 실정.

박실장은 "청소년들의 사회 적응을 도와 재가출을 방지하고 가정으로의 정상적 복귀가 어려운 경우에는 이들을 수용해 자립과 재활 능력이 생길 때까지 보호하고 지원할 시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출청소년 보호의 근거가 되는 법안 마련도 시급하다. 미국에서는 74년 '가출청소년법'을 제정해 가출청소년 보호서비스 제공과 재정적인 지원을 연방정부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가출청소년에 대한 법적 지원이 전무한 상태. 중앙대 청소년학과 문성호(文聖浩) 교수는 "보호시설에 들어오는 청소년 대부분이 오랜 길거리 생활로 피부병, 각종 성병 등에 시달리고 있지만 의료보험 혜택조차 받지 못하는 처지"라고 전했다.

'거리상담'의 확대도 요구되고 있다. 청소년쉼터에는 97년부터 식사제공과 의료지원이 가능한 이동차량을 동대문, 대학로, 신촌 등 가출청소년 밀집지역에 배치해 청소년에 대한 거리상담과 각종 긴급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거리상담이 지향하는 것은 이들과의 감정적 교류. 상담원들이 대학로의 춤추는 아이들, 여의도 오토바이 폭주족 등이 주로 찾는 곳에 3개월 이상 상주하면서 이들의 마음의 문을 열려고 노력한 결과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협성대 사회복지학과 문향초(文香草) 교수는 "상담자들이 직접 거리로 나가 청소년들과 차곡차곡 신뢰를 쌓아간다면 청소년들을 사회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최지향기자 mis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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