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 이름을 '모나미 153'으로 정하고 나니 남은 문제는 시판 가격을 정하는 일이었다. 당시는 보릿고개가 엄존하던 시절이었다. 경제 부흥의 물꼬는 텄지만 여전히 허리 펴고 살기는 힘든 때였다. 그런 시대에 볼펜의 주소비자가 될 학생, 회사원, 공무원들의 주머니 사정이란 뻔한 것이었다. 요즘이야 1원의 가치를 거의 느끼지 못하지만, 당시는 지금 돈 1원 만큼의 가치가 살아 있었다. 그래서 볼펜 한 자루 값을 매기기가 여간 힘들고 민감한 사안이 아닐 수 없었다.그렇다고 기술개발에 들인 공을 완전히 무시하고 헐값에 팔 수는 없었다. 고민을 거듭하다 나는 볼펜 한 자루 값을 15원으로 정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서울 시내버스 요금이 15원, 신문 한 부 가격이 15원이었다. 나는 더도 덜도 말고 시내버스 한 번 탈 수 있는 값, 신문 한 부를 살 수 있는 정도의 값이라면 소비자를 납득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40년이 지난 지금, 내가 볼펜 한 자루 값을 정할 때 기준으로 삼았던 서울 시내버스 요금은 600원으로 40배가 올랐다. 신문 한 부는 그때보다 33배 이상 올라 500원에 팔리고 있다. 반면 15원에 시작한 모나미153 볼펜 한 자루 값은 180원으로 12배 오르는데 그쳤다.
볼펜 값이 다른 제품 가격이나 서비스 요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자리 걸음을 한 데는 이유가 있다. 예전에 정부는 모나미153 볼펜을 독과점 품목으로 분류해 놓고 제조사 마음대로 가격을 올리지 못하도록 했다. 볼펜이 독과점 품목에서 제외된 것은 불과 10여년전 일이다. 게다가 볼펜은 정부가 물가상승률을 파악하는데 사용하는 기준 품목에 포함돼 있었다. 모나미153 볼펜의 경우 원자재 값 상승 등으로 가격인상이 불가피한데도 정부의 물가 억제 정책 때문에 인상을 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80년대초 모나미153 볼펜 한 자루 값을 100원에서 120원으로 20% 인상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른 공산품이 1,000원에서 1,100원으로 100원 오르면 10% 인상에 그치게 된다. 볼펜은 가격이 워낙 싼 탓에 이처럼 한번 가격을 올리면 인상률이 높게 나타나 결국 전체 물가상승률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자연히 정부로서는 가능한 한 볼펜 값을 잡아두려고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볼펜 값을 얘기하다 보니 떠오르는 일이 하나 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오랫동안 30원으로 묶여있던 모나미153 볼펜 값을 50원으로 올린 적이 있다. 인건비와 원자재 값 상승이 원인이었다. 가격을 올린 바로 다음날 회사로 전화가 왔다. 모 일간지 경제부장이라는 비서의 전언에 솔직히 받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전화 인사를 나누자마자 그는 적당히 위압적인 톤으로 말을 이어갔다. "송 사장님, 배짱 좋으십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볼펜 값을 많이 올리셨더군요. 30원짜리를 50원으로 66%나 올리다니 그래도 되는 겁니까."
젊었을 때 나는 상당히 다혈질이었다. 상대의 은근히 비꼬는 듯한 말에 화가 치밀었다. "이보쇼. 내가 볼펜 만들 때 값을 어떻게 정한 줄 아시오. 당신네 신문 한 부 값 15원에 맞췄소. 그런데 지금 신문 한 부 값이 얼마요. 100원이요, 100원. 그런데도 우리한테 너무 많이 올렸다고 할 수 있소. 어디 많이 올렸다는 근거를 대보시오."
예기치 않은 나의 반격에 당황한 상대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모나미153 볼펜의 가격 인상을 비난하는 기사가 나오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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