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전국 농민 7만 여 명의 한 풀이 시위가 벌어졌던 13일, 경기 이천시 신둔면 마교리. 개발 바람에 수도권에서 떠밀려 나간 화훼 농가들이 가장 먼저 터를 잡았다는 단지다. 연 소득 억대 농가들이 밀집한 이 곳의 터줏대감 홍완식(49)씨의 파이프온실 안은 시클라멘 묘종 분갈이 작업이 한창이었다. 홍씨와 품일 나온 주민들은 잠시도 손을 놓지 못했다. 200여 평 남짓 공간을 채운 어린 화분(약 3,000여 개) 분갈이를 끝내기도 벅찬 데 다음날 출하할 꽃을 미리 추려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30년 꽃 농사꾼 홍씨의 마음은 더 바쁘다. "농한기요? 여긴 그런 거 없습니다. 일손 구하기가 꽃 농사 짓는 것 보다 더 힘들어요."
이천의 겨울 들녘은 여느 농촌과 다름없이 을씨년스러웠다. 시설채소 농사가 보편화하는 추세라지만 농촌의 겨울은 예나 지금이나 연중 가장 한가한 계절. 하지만 신둔화훼단지 내 23개 꽃 농가의 온실 안은 난방 열기 못지않은 작업 열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서울 양재동 농산물유통공사나 경기 일산의 화훼조합으로 출하도 해야 하고, 온실 내 연탄 난로도 가설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내달 크리스마스 물량 준비도 급하다. 모내기 끝난 뒤 가을시즌을 준비하고, 추수 끝난 뒤 이듬 해 봄 시즌을 준비하는 게 이 곳 화훼 영농 스케줄로 굳어진 지 오래다. 그래도 추위가 일찍 온 올해는 수입이 나아질 것 같다는 기대로 마을은 들떠있었다.
1,000평 비닐하우스에 프리지아 단일작목으로 승부를 건 농사꾼 수하리 정인목(58)씨의 얼굴은 꽃보다 더 환했다. "어제 경매에 내보냈더니 한 속(열 송이)에 3,000원을 쳐 주더라"며 "본격 출하가 시작되면 좀 내리겠지만 지난해(평균 1,700원)보다는 적어도 500원 정도 오를 전망"이라고 흥분했다. '춤추는 무희'라는 꽃말이 붙은 양란 온시디움을 출하중인 유무준(46)씨도 작목 선정에 성공했다며 흐뭇해 했다. 온시디움 인기가 시들하던 지난 해 1월, 자동온실 500평에 묘종(300원)을 심었는데 현재 그게 화분 하나에 4,500원씩 나가고 있다. 3,100평 온실에 군자란 홍콩야자 등 관엽과 동양란 등을 재배하고 있는 그는 내년 2월까지 출하할 온시디움에서만 1억원 가량의 매출(순이익률 50%)을 기대하고 있다.
화훼농가가 바빠지면 단지 인근 마을 주민들도 분주해진다. "논 일이 아무리 바빠도 일 년에 모내기 한 달, 추수 한 달해서 두 달 아닙니까. 여기는 1년 열 두 달 쉴 틈이 없어요." 일당 2만5,000원짜리 부업을 나선 이인희(59·여)씨는 "나이가 들어도 여자는 여자"라며 "일은 힘들지만 꽃 구경 하면서 하는 일이니 즐겁다"고 말했다. 그는 일당 가운데 5,000원은 부식비로 쓰고, 나머지는 저축한다고 했다.
신둔화훼단지가 조성된 것은 1990년 초. 서울 하남 등지서 꽃을 키우던 10개 농가가 정부로부터 시설비의 80%(융자 40% 포함)를 지원 받아 정부의 화훼특화 1호단지로 출범했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전후해 정부가 '똥 거름에 상추 심는' 농사가 외국인 눈에 거슬린다며 화훼 전업을 한창 부추기던 시기다. 하지만 신둔단지 출범 원년 맴버들은 모두 업력 10∼30년씩 묵은 베테랑이었고, 그래서 90년대 농정당국의 유혹에 현혹돼 섣불리 화훼를 시작한 수도권 인근 시·군의 유리온실 농가 실패 행렬에서 비껴 설 수 있었다.
단지 조성 초기에는 지역 주민들의 반발도 있었다. 외지인들을 지방비까지 보태줘 가며 끌어들이는 게 못마땅했던 것. 하지만 10여 년이 지나면서 신둔단지는 인근지역 농민들의 짭짤한 농한기 부업 터전으로, 이천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효자단지로 뿌리를 내렸다. 매년 열리는 도자기축제나 국제도자기엑스포는 물론이고, 음악회 등 각종 시·군 행사 때마다 꽃을 지원하기도 한다.
농가당 연간 순이익 억대 단지로 터를 닦은 이들의 성공에 자극을 받아 이천시 화훼농가는 인근 수하리 도암리 등지 100여 가구로 늘었고, 요즘도 매년 10여 농가가 새로 시작하거나 수도권 등지에서 유입되고 있다. 시 관계자는 "다른 지방자치단체처럼 마을 주민들에게 시설비 대주고 기술 가르쳐가며 단지를 만들었다면 숱한 시행착오를 거쳤을 테고, 지금과 같은 성공을 거두기도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년 맴버들의 기술력과 리더십은 신둔단지가 여느 화훼단지와 차별화할 수 있었던 경쟁력의 든든한 배경이다. 화훼경력 40년에 안 키워 본 작목이 없다는 임종두(56)씨. 화훼단지 농사꾼들은 "젊은 농장주 치고 그의 꾸지람을 안 들어 본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했다. 임씨는 "게으름을 피거나 농사를 어설프게 하는 것을 보면 남 농사라도 화가 난다"고 했다. 그는 크리스마스 트리용으로 잘 나가는 북미산 관엽수 아레오카리아를 95년 국내에 처음 들여와 재배한 것으로, 또 아레오카리아에 관한 한 추종을 불허하는 전국 1등 농사꾼으로도 업계에서는 유명하다.
홍씨 역시 2∼3년 전부터 전국 화훼농가 사이에서 고소득 신화의 주역으로 떠오른 겨울 시클라멘 재배법을 국내에 도입한 주인공이다. 이천농업기술센터 신동윤 지도사는 "대국(大菊) 등 국화재배의 권위자인 박석관씨 등 작목별 고수들이 즐비하고, 이들이 수시로 모여 토론하며 재배기술도 전수한다"며 "그러다 보니 도매상인들도 신둔단지 상품이라면 가격을 함부로 못 후려친다"고 말했다. 소수(혹은 단일)작목을 특화한 일반 화훼단지와 달리 관엽부터 시작해 절화(꺾음꽃), 분화(화분꽃) 등이 단지 내에 골고루 분포해 있다는 점도 화훼농가 입장에서는 단합의 토대가 되고, 상인들 입장에서는 물건하기 편한 이점이라고 그는 귀띔했다.
단지 내 화훼농장주들은 그러나 화훼에 대한 섣부른 기대는 금물이라고 입을 모았다. "매출이 500평에 1억원, 1,000평에 1억원 하니까 너도 나도 꽃 키워 보겠다고 덤벼들지만 그런 농가는 1∼2%도 안됩니다." 꽃 만큼 경기와 수급에 민감하고, 작목 선정부터 품질 관리에 어려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한 농장주는 "이 곳에서 성공한 30∼40년씩 된 농가들도 적어도 한 두 번씩은 다 키운 화초를 갈아 엎고 빚 걱정에 밤잠을 설쳐 본 경험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천=글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사진 김재현기자
● 화훼농 정부지원 문제점
"정부에서 가라는 곳 반대로 가면 성공확률이 더 높을 겁니다." 화훼 농가들의 농정에 대한 불만도 여느 농사꾼들과 다르지 않았다.
한 농장주는 "어렵사리 외국에서 신 품종과 재배법을 들여와 돈이 된다 싶으면 농림부나 농촌진흥청 같은 곳에서 견학을 오죠. 기술을 전국 화훼농가에 확산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고 나면 이듬해에는 어김없이 과잉생산으로 이어지고, 뒤늦게 뛰어든 농가는 빚만 안고 쓰러지는 거죠. 처음 고생했던 농가 역시 한 두 해 재미 보고 주저앉는 식입니다.
시크라멘이 대표적인 경우다. 일부 농민들이 일본, 프랑스 등지를 다니며 여름에 파종해서 겨울에 상품화하는 시크라멘 신품종과 재배법을 익혀 2000년 국내 재배를 시작한 뒤 첫 해 인기가 치솟았고, 매스컴에 소개되고 정부 당국이 전국 화훼농민들에게 농사기술을 보급하면서 재배농가가 급증했다. 결국 4,800원 하던 화분 하나 값이 올해는 2,000∼2,500원 선으로 주저앉았다. 그는 한 육종학자의 도움으로 화분에서 키울 수 있는 카네이션 신품종을 들여 와 내년 어버이날 전후 출시할 계획이지만, 성공하더라도 매스컴 소개나 농가 견학지 선정은 사양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한 농장주는 "정부가 자금을 지원한다고 나서면 겁부터 난다"고 했다. 자기에게만 주는 게 아니라 전국 농민에게 다 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은 과잉설비, 과잉생산으로 이어져 화훼농가가 함께 망하는 길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꽃 수출은 아직 멀었고, 내수시장마저 뻔한 게 우리 실정"이라며 "정부가 할 일은 내수 키우고 해외시장 개척하고 선진국들처럼 좋은 종자 만들어 싸게 보급하는 일"이라고 꼬집었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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