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때 일이다. 우연히 잡지에서 '햄(Ham·아마추어무선)'이라는 용어를 봤다.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떤 신비한 매력에 이끌렸다. 우체국으로 달려가 몇 백원인가를 소액환으로 바꾸어 송금을 하고 주문한 책이 배달되기만 손꼽아 기다렸다.당시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고 계셨고 추수철이라 방과 후 벼 타작을 돕고 있던 중 기다리던 책이 도착했다. 책을 받자마자 눈 한번 떼지 않고 단숨에 모두 읽었다. 책장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쌓아놓은 볏짚 한쪽 구석에서 부모님의 일손을 돕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정도였다. 그때의 인연으로 전파통신에 심취하게 됐고 지금의 나의 인생은 사실상 그때 이미 결정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학교 때 생활은 그저 자나깨나 '무선'이었다. 읍내에 나가 전파사와 고물상을 뒤지고 부품을 구해 라디오를 만들었고, 단파방송 수신에 열을 올렸다. 서울에 있는 '무선연맹'에도 우편으로 가입을 하고, 국내외 다른 햄들이 교신하는 것을 밤새워 들어가며 직접 무선국을 개국해 운용하는 '국장님'의 꿈을 키워갔다.
중학교 졸업 후 혼자 서울로 상경해 자취, 하숙생활을 하면서 그토록 배우고 싶던 모르스 부호는 물론 지금의 통신보안전문가로서의 기초가 된 유·무선 통신기술에 대해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는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본격적으로 무선세계에 빠져들었다. 돌이켜보면 당시 까까머리 학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취미가 유별난 덕분에 내가 만난 사람들은 거의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어른들이었다. 아마 그때부터 일반사회에 좀 더 빨리 눈을 뜨게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다보니 빵집보다는 다방에 들르는 일이 많았으며 친구 표현을 빌리자면 '큰 애들' 하고만 놀게 되었다. 그때 선생님은 내 이름을 '안교신'으로 바꾸라고 하셨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 모든 것은 그 이후 내가 일사천리로 한길만을 걸어오게 한 계기가 되었다. 취미가 직업이 되고, 거기에서 최고 전문가의 보람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도시학교로 진학한 동생의 뒷바라지를 하신 형님 내외분의 커다란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요즘 부모들의 판단과 선택으로 좌지우지되는 교육 세태에 비추어 볼 때 아이들에게 소질과 재능을 키워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느끼게 한다.
/안 교 승 한국통신보안(주)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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