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현대사를 밝혀 주던 민족의 별이 15일 밤 스러졌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영웅 손기정옹이 90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대한의 아들 딸은 일제 강점기의 암울함 속에 그의 쾌거와 기백을 보며 현실에 주눅 들지 않는 용기를 얻었다. 그는 민족이 어둠을 헤쳐 나오도록 이끈 밝은 등불이었다. 큰 등불, 찬란한 별을 잃고 겨레가 슬픔에 잠긴다.운동을 좋아했던 손기정은 '돈이 한 푼도 안 들기 때문에' 마라톤을 선택한 가난한 식민지 소년이었다. 가슴에 일장기를 단 채 달리고 애국가 대신 일본국가를 축하연주로 들어야 했던 그였지만, 베를린의 방명록에는 '손긔졍 KOREA'라고 사인을 할 정도로 명료하고 성숙한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아직 양정고보 학생이었던 그는 마라톤 자체로도 영웅이었다. 당시로는 불가능할 것 같던 2시간 30분 벽을 넘어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이다.
우리가 약소민족이 아니라는 의식을 겨레와 전세계에 뚜렷이 각인시킨 그의 그 후 행적에도 부끄러움이 없다. 그는 메이지대 법대를 졸업했으나, 혼탁한 정치 세계와는 거리를 두고 광복 이후에도 체육 지도자의 외길을 걸었다. 그의 지도 아래서 한국선수들이 1947년과 50년 보스턴마라톤에서 각각 우승하는 쾌거를 올렸다. 그 당시 한국의 마라톤 강국 기반이 잡혔다.
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최종 성화주자로서 노(老) 마라토너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단순히 마라토너나 체육 지도자가 아니었다. 어려움에 처한 민족에게 뜨거운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문화국가로 성장하도록 풍부한 자양분을 제공한 선각자였다. 비교적 장수한 편이지만, 손옹이 황영조 이봉주 등 후배선수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하는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어 가슴 아프다. 노 마라토너를 보내는 산하가 눈시울인 양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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