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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척도 不在의 공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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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척도 不在의 공황

입력
2002.1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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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절의 대웅전 기둥에 다음과 같은 글이 써있었습니다. '길지 않은 것은 또한 짧지도 않다.' 알기 힘든 말입니다. 길지 않으면 짧아야 하고, 짧지 않으면 길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식이 존중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긴 것은 또한 짧은 것이다'라는 말인데, 그 역설이 쉽게 소화되지 않았습니다.하기야 이러쿵저러쿵 사물에 대한 제각기 다른 판단에 시달리는 것이 세상살이이고 보면 논쟁이란 하릴없는 사람들의 못난 짓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말의 성찬이란 속이 빈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또 삶의 바닥에 이르고 보면 사물의 드러난 차이가 진정한 다름일 수 없다는 터득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깊이 삭여야 할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디 삶이란 일정한 판단에 기대어 지탱합니다. 짧다든지 길다든지, 옳다든지 그르다든지 하는 분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삶의 과정에서 한시도 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판단을 위한 척도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잣대는 상당한 폭으로 사람들과 공감대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의 공동체는 공동체답게 됩니다.

그런데 척도가 서로 다르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공감하는 판단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것이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진 것이면 사태의 심각성은 훨씬 더 합니다. 자기 판단의 절대성은 필연적으로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태도에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덕이나 법이나 관행들은 이러한 사태에 이르지 않으려는 잣대들입니다.

아예 아무런 준거도 없는 판단과 주장이 난무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기준의 적용으로 인한 판단의 혼란이 아니라 '척도부재로 인한 판단의 공황'이 일게 됩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좇아 '제 멋대로 사는 삶'이 그러합니다. 그러한 행동은 제어할 길이 없습니다. 상식이라는 최소한의 기준이라도 공유하고 있어야 할 텐데, 그것마저 부정되는 형편이니 관습이나 법이나 도덕조차 현실성을 가질 까닭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을 '정상인'의 범주에 넣기조차 어려워집니다.

그런데 요즘 이와 비슷한 사태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다스림'을 통해 봉사하겠다는 '귀한' 분들이 자신의 판단이나 행동을 설명하는 언어들 속에서 이러한 현상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 저것인가 하면 또한 그것도 아닙니다. 어떤 판단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데, 그래서 고뇌도 담기고, 아픔도 지닌 것 같은데, 판단의 준거를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내 모자람 탓이려니 하고 생각하기도 하고, 지극한 경지에 든 분들의 감히 짐작도 못할 행동일지도 모른다고 겸손해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혹은 풀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나를 당혹하게 했던 판단이나 주장은 어느 틈에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태는 분명합니다. 판단을 위한 어떤 척도도 가지지 않은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소란 속에 우리는 빠져 있는 것입니다. 잣대 부재가 빚은 판단의 공황 속에서 거의 파탄할 것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속물의 속물다움은 가장 귀한 것으로 자기를 치장할 때 드러납니다.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의 비정상성도 그러합니다. 자기가 끊임없이 정상적임을 주장할 때 그는 이미 비정상적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척도도 없이 판단을 남발하면서 횡포를 부리는 사람들이 횡행하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척도를 마련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 일을 다 마친 다음에 대웅전에 가서 그 글을 읽어도 결코 늦지 않습니다. 아니, 그 때 비로소 그 글의 참 뜻을 헤아릴 수 있을 듯 합니다.

정 진 홍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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