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이었다. 신기했다. 거북 머리처럼 하얀 몸통을 들락거리며 잉크를 술술 토해내는 녀석의 모습을 보고 난 그 자리에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잉크를 찍지도 않고 글씨를 쓸 수 있을까, 몸통 안에 잉크를 가득 채워놓은 것일까, 분명 만년필은 아닌 것 같은데‥. 내 머리는 온통 이 신기한 녀석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내 마음을 온통 빼앗아 버린 볼펜과의 첫 만남은 참으로 우연이었다.1962년 4월20일. 서울 도심 한복판 경복궁은 전국에서 몰려든 인파로 북적거렸다. 5·16 군사쿠데타-그들은 군사혁명이라고 불렀지만-1주년을 기념하는 국제산업박람회가 열린 것이다. 일제 때 만국박람회가 열린 적은 있지만 해방 이후 외국 기업까지 참여하는 박람회가 열리기는 처음이었다. 사실 말이 국제박람회지, 우리 기업들이 출품한 제품들은 정말 보잘 것이 없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산업시설을 조금씩 복구해 가고 있는 현실에서 공업제품의 질(質)을 따진다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국제박람회는 그래서 철저히 수입에 의존해야 했던 한국 시장을 공략하려는 외국 기업들의 각축장이 돼버렸다.
6월5일까지 계속된 국제박람회는 대성황이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민의 호감을 사려는 일들을 계속했다. 국제박람회도 그런 대국민 인기 전술중 하나였고, 정부도 박람회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34살의 나는 광신화학공업주식회사 상무였다.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 하겠지만 난 이 회사에 지분 10%를 출자한 주주이자 직원이었다. 무역회사로 출발한 광신화학공업은 일본에서 문구류를 수입해 팔면서 '모나미물감'과 '왕자파스'를 자체 생산하고 있었다. 두 제품은 당시 선발업체인 '삼성 물감'과 '지구표파스'에 맞서 조금씩 시장점유율을 확대해가는 신흥브랜드였다.
우린 비록 선진국 제품보다 질이 떨어지지만 국산 제품의 가능성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국제박람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박람회 참가 경험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고민 끝에 문구류 수입원이자 일본 최대의 문구·사무기기 제조·유통업체였던 우치다요코(內田洋行)측과 공동 참가하는 방법으로 경험과 운영 노하우를 배우기로 했다.
우치다요코측은 신속하게 국제박람회에 전시할 제품과 함께 소키쿠(雙菊)라는 과장급 직원 1명을 파견했다. 그는 우리 직원들과 숙식을 함께 하며 박람회를 준비했다. 박람회 개막 첫날 행사가 끝나자 소키쿠 과장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본사에 보낼 일일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책상 위에 있던 펜과 잉크는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양복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쓰는 게 아닌가. 펜촉에 잉크를 묻혀가며 서류를 정리하던 나는 뭔가에 얻어맞은 듯 얼이 빠져 버렸다. "생김새로 봐서 만년필은 아닌데. 저게 도대체 뭘까." 내 시선을 의식한 듯 소키쿠 과장은 보고서 작성을 하다 녀석을 귀에 걸어 보기도 하고 입에 물어 보기도 하며 나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했다. 그 시절 우리가 쓰던 필기구는 만년필, 펜, 연필, 붓 등이 고작이었다. 펜을 쓰다 잉크병을 엎질러 서류는 물론이고 옷이나 가방이 못쓰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만년필은 대부분 고가 수입품이어서 엄두도 내지 못하던 때였다.
그러니 잉크를 찍어 쓰지 않는 볼펜이라는 존재는 신기할 수 밖에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신제품이 국제박람회 전시용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일본에서는 대중들에게 일반화한 제품이었던 것이다. "저걸 우리가 생산할 수 없을까." 순간 그런 생각이 내 머리 속을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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