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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35) 시인 최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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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35) 시인 최하림

입력
2002.1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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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사람 치고 '왜 나는 쓰는가'를 자문해보지 않는 사람은 없을 터이다. 별 신통한 답을 얻지 못하면서도 써야 하는 숙명에 대한 의문 때문에 '왜'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할 터이고 용두사미와 같은 답을 반복해서 우리는 내리게 될 터이다.'나는 왜 쓰는가'라는 물음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고 분명한 것도 아니다. 그 물음은 사회와 역사와 신화로 길이길이 뿌리를 뻗어 내려갈 수 있으며 바람과 나무와 강과 별과 새에게로 확산해 갈 수 있다. 문학은 특정한 시대와 환경에서 성장한 작가가 세상과 접촉하면서 가지게 되는 사회적 관계와 조건들 속에서 쓰여지는 것이라 한다면 문학은, 특히 시는, 그보다도 훨씬 더 깊이 들어가고 높이 올라갈 수 있다. 시는 존재 그 자체이자 그 증거이며 물음일 수 있다.그러나, 내가 여기서 문학을? 이라고 했을 때는 그런 어려운 차원이 아니다. 나는 작고 사소하면서도 나에게 소중한 의미가 있을 수 있는 차원에서 문학을(시를) 이야기해보고 싶을 뿐이다.

1960년대 말 4월 혁명이 좌절되고 5·16이라는 군사문화가 저벅저벅 거리를 누비고 있을 때 명동이나 무교동, 관철동 일대의 뒷골목에서는 밤마다 젊은이들이 막걸리를 마시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술에 취한 소리들이었고 어두운 소리들이었으며 낭만적인 소리이기도 했다. 그런 소리들 속에서 시를 쓰는 젊은이들도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왜 시를 쓰는가'라고 젊은 시인들에게 물었다. 젊은 시인들은 돌아가며 한 마디씩 했다. 그들이 무어라고 했는지 남아있는 것이 없지만 내가 '극기(克己)'라고 했던 것은 희미하게 떠오른다. 내 말이고 내 문제였기 때문에 기억에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내가 왜 '극기'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캄캄절벽이다. 아마도 60년대를 살기가 너무 힘들었고 70년대 역시 막막했기 때문에 나를 이기고 나를 추스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극기'를 떠올렸으며, 그러므로 시에 있어서도 '극기'가 화두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 무렵 나의 삶에는 '극기'가 화두로 등장할 만도 했다. 해방이 된 지 3년 만에 아버지는 지병으로 돌아가셨고 6·25 다음해에 우리집은 폭삭 망했다. 나는 등록금을 내지 못했다(그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나는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많았다. 나는 오거리와 해안통 거리를 날마다 배회했다. 사리 때 해안통 거리를 걸을라치면 중선배의 돛대들이 베르나르 뷔페의 직선처럼 수도 없이 하늘로 솟아 있었고, 갈매기들이 날고 있었고, 술에 취한 선부들이 배에서 서너 명씩 내려와 사창가 골목으로 비틀거리며 들어갔다. 불현듯 시 같은 것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나에게 시 같은 것을 가르쳐 준 것은 국어 선생님도 아니었고 문예반도 아니었고 선배들도 아니었다. 사리 때의 해안통 거리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등록금도 낼 길이 없이 빈한했던, 언제나 뱃속에서 쫄쫄쫄 소리가 흐르는 굶주림이 시 같은 것을 떠올리는 풍경으로 나를 인도했고, 나는 시 같은 것에서 시로, 시의 길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나에게 시를 가르쳐준 것도 '극기'를 가르쳐준 것도 굶주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무렵, 굶주림이 극기와 비등한 화두로 내게 등장했던 것은 아니다. 굶주림은 '극기'를 가르쳐주었을 뿐 그것 자체가 문제로 등장하지는 않았다. 굶주림은, 혹은 가난은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한 문화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 무렵 우리 주위에는 굶주림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청계천 다리 밑은 말할 것 없고 김승옥이나 이성부 조태일 원동석에게도 굶주림은 꼬리처럼 붙어다녔다. 나는 아침이나 혹은 저녁을 굶었다. 굶주림은 그다지 고통스러운 것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나는 그것에 무릎을 꿇거나 지치지도 않았다. 그것이 나를 소외의 방으로 점점 밀어낸다는 사실을 조금 의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뜨거운 열정으로 시를 쓰고 또 썼다. 그러던 어느날, 뜻밖에도 나는 나의 말들이 우리의 말이어야 하며, 가난한 사람들의 말이어야 하며, 고통의 말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가난과 고통은 나의 굶주림과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인식은 70년대 말의 민주화운동과 맞물리면서 나를 뜨겁게 달구고 폭발처럼 터져 올랐다. 매우 내성적이었던 만큼 내 안에서 몸부림치고 소용돌이쳤다. 나는 '나'를 접어두고 '우리'로 시를 썼다. 70년대와 80년대 초의 모든 시들은 '우리'라는 인칭대명사로 쓰여졌다. 우리는 경제적 평등이라 할까, 민주주의라 할까, 후천개벽과 같은 새 세상을, 적어도 오늘보다는 나은 세상을 열어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나는 역사 발전을 믿었다.

레비-스트로스는 현대가 고대보다 휴머니스틱한 것은 당대적 가치와 기준 때문이라고 했다(그는 고대인들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를 보았다면 탄식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기층민들의 삶이 그제보다는 어제가 낫고 어제보다는 오늘이 나을 것이라고 보았다. 나는 역사는 느리게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발전해 간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런 발전의 행보 속에서 5월 광주라는 끔찍한 사건을 나는 만났고, 5월 광주는 나를 어둠의 구렁텅이로 내던져 버렸다. 앞도 뒤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캄캄하고 캄캄했다. 나는 두 손을 허우적거리면서 지옥과도 같은 암흑 속을 기어갔다. 나는 암흑의 벽에 부딪쳐 뇌졸중을 일으키며 쓰러졌고, 병원에 입원했고, 한달 뒤쯤에는 다시 일어나 봄날의 햇빛과 돌담 새의 풀꽃들을 보았다. 아름다웠다. 몹시 아름다웠다. 내 두 눈에서는 나도 모르는 새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 눈물이 새롭게 나를 부활시켜 주었다.

그 눈물에는 의심도 회의도 부정도 개입할 틈이 없었다. 눈물은 사랑이었다. 눈물은 시였다. 눈물은 병든 내 마음을 쓰다듬어주고 연민의 시선으로 물끄러미 오래오래 나를 보아주었다. 나는 눈물을 씻고 일어섰다. 나는 하늘을 보고, 나무들을 보고, 강을 건너 들로 나갔다. 새들이 날아가고 다람쥐와 청설모들이 경쟁이라도 하듯이 리드미컬하게 벼랑을 타고 올라갔다. 해가 져 갔다. 무섭게 빠른 속도로 산그림자가 달렸다.

나는 산 너머 하늘 너머 마을과 어머님의 둥근 무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그 고향과 무덤에는 서남해 바다가 금빛으로 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시들은 그 마을과 무덤과 바다로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굶주림의 소리를 들으며 해안통의 거리를 볼 때도, 빈자들의 유랑의 시를 쓸 때도, '속이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의 시를 쓸 때도 나의 시들은 다같이 머리를 서남해로 두고 있었다. 서남해는 내 시의 뿌리 은유이자 뿌리 상징이었다.

뽕나무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된다고 옛 사람들이 말했듯이 세월 속에서는 세상도 사물도 말들도 변해가는 모양이다. 20여 년 동안 나는 서울에서 광주로, 영동으로, 양수리로 짐을 싸들고 이동했다. 그 사이에 서남해도 색조가 변하고 모습이 바뀌어져 금강이나 북한강 정도의 강물이 되었다. 나는 아침에 또는 저녁에 햇빛을 받고 반짝이는 강물을 따라 차를 타고 달리면서 물을 생각한다.

나에게 저 물은 무엇인가? 저 아름다운 산들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이 모여 강을 이루면서 흘러가는 그것은 나에게 무엇인가? 어째서 물은 아침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고 밤에 다르며, 어째서 어제도 흘러가고 오늘도 흘러가고 내일도 흘러가는 것인가? 이런 별 내용도 없고 쓸모도 없는 질문들을 하다가 보면 그 물 아래, 질문들 아래 물끄러미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붉은 얼굴의 아이가 떠오른다. 그 아이는 내 어린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같고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먼 나라의 아이인 것도 같다.

나는 요즘 그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다. 나는 그 아이가 '극기'와는 어떤 연관이 있으며, 내가 보고 있으되 과연 나와 상관이 있는지, 내가 저만큼 물 속으로 밀어낸 얼굴인지, 다만 물 속에 떠오른 얼굴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틈틈이 생각해 보고 있는 중이다. 글쓰기에 대한 물음이 이렇다 할 답을 얻지 못했듯이 그것도 생각에 그치고 말겠지만, 그 생각을 거듭하면서 사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리라. 사람다운 위의(威儀) 같은 것이 서리리라.

● 연보

1939년 전남 목포 출생 1963∼65년 김현 김승옥 김치수 염무웅 등과 '산문시대' 동인 활동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빈약한 올페의 회상' 당선 등단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 '겨울 깊은 물소리' '작은 마을에서'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시론집 '시와 부정의 정신' 김수영 평전 '자유인의 초상' 미술 에세이 '한국인의 멋' 등 조연현문학상(1991) 이산문학상(1999) 현대불교문학상(2000)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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